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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매일신문 <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이데일리 <정덕현의 끄덕끄덕> 등 칼럼을 연재하며, 미디어와 문화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를 썼다.

불꺼진 서울의 새벽 먹자골목들

‘밤이 깊어도 많은 사람들. 토론하는 남자, 술에 취한 여자. 모두가 깊이 숨겨둔, 마음을 못 본체 하며, 목소리만 높여서 얘기하네- 흔들리는 사람들. 한밤의 재즈 카페-’ 1991년 신해철의 정규앨범 ‘Myself’에 수록된 타이틀곡 ‘재즈 카페’의 가사를 들여다보면 당대의 시끌벅적했던 도시의 밤 풍경이 그려진다. 밤이 깊었지만 재즈 카페에서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소리 높여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북적이던 서울의 밤. 하지만 만일 이 곡이 지금 나왔다면 그다지 공감할 수 없는 가사가 됐을 것이다. 한때 밤이 없는 것처럼 불야성을 이루던 도시의 밤 풍경은 이제 사라진 옛 기억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유명 먹자골목도 대학가의 상권들도 심지어는 24시 편의점도 이제는 밤이 되면 불을 끄기 시작했다. 새벽에 길거리를 활보하던 사람들도, 귀갓길을 재촉하는 택시들의 행렬도 사라졌다.

지난 3월 15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식품산업통계정보가 내놓은 통계자료를 보면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도, 또 국지적인 현상도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서울 8대 먹자골목의 새벽 시간(오전 0시부터 6시까지) 결제 건수가 2020년 대비 최소 11%에서 최대 45.8% 감소한 것으로 통계자료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대림골목시장(일명 감자국거리)은 2020년 1만 7,316건에서 2023년 9,375건으로 45.8%의 결제건수의 감소율을 보였고, 용두동 주꾸미골목은 2020년 8,613건에서 2023년 6,169건으로 28.3%의 감소율을 보였다. 또 대학가에 인접해 졸업 후에도 찾는 이들이 많았던 신림순대타운의 경우도 2020년 6만 392건에서 2023년 4만 4,557건으로 26.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감소율은 성내동 주꾸미골목(-24.1%), 약수역 먹자골목(-17.4%), 논현동 먹자골목(-16.4%), 왕십리 곱창골목(-16.2%), 공덕시장 족발골목(-11%) 등 거의 모든 서울의 주요 먹자골목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출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아 옛날이여, 호황기 새벽상권 시절의 풍경

지금의 이 밤 풍경은 시간을 되돌려 90년대말부터 서서히 변화해 불야성을 이루던 시절의 풍경을 떠올려보면 ‘아 옛날이여’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몇 차를 하고도 입가심으로 맥주를 먹고 그리고 나서도 새벽 라면집에 들러 해장을 하는 풍경이 대학가부터 직장 주변에서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놀이공원이 야간개장을 했고, 밤새워 영화를 보는 심야영화가 영화광들을 끌어 모았다. 동대문 쇼핑몰들은 야간 쇼핑족들을 잡기 위해 불을 밝혔고 한강 둔치에는 야행족들이 밤새워 낭만을 구가했다. 밤 새워 운영하는 찜질방과 식당, 클럽들이 도시인들을 잠 못들게 했다. 24시간 편의점은 그 시대의 상징이 됐다.

물론 도시의 밤이 불야성이 된 건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82년까지는 야간통행금지가 있었고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밤은 ‘금기의 시간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기말 분위기와 더불어 1997년부터 야행족들이 주로 대학가의 주점이나 포장마차, 한강둔치 등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밤의 풍경이 서서히 바뀌었다. IMF 관리체제로 불황에 처한 상권들도 타개책으로서 심야영업을 본격화했다. 대형마트, 노래방, 게임방, 라면집들이 줄줄이 새벽을 달리는 야행족들의 발길을 잡아 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밤샘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 건 MZ세대들로 대변되는 개인주의 성향의 문화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면서다. 먼저 직장 회식문화가 바뀌었다. 업무의 연장으로 여기던 회식자리에 모두가 참여해야만 한다는 집단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라고 빠져나가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젊은 세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IMF를 겪으며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진 일터는 이제 ‘워라밸’의 관점으로 인식되게 됐다. 나의 삶이 더 중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밤새워 부어라 마셔라 하는 회식문화는 서서히 사라졌다. 이런 변화는 대학가에도 생겨났다. 밤 문화의 대부분이 술문화와 관련이 있었다면, 술이 아닌 저마다의 다양한 취미들을 각자 향유하기 시작한 대학생들은 이제 하릴없이 밤 거리를 헤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게 됐다.

밤샘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된 건
MZ세대들로 대변되는
개인주의 성향의 문화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면서다.

밤 문화는
사라진 게 아니라 달라진 것

이러한 개인주의적 성향이 만들어지던 차에 최근 벌어진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은 밤 문화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집합금지명령, 영업시간 규제 등으로 야간 영업은커녕 조기 귀가하는 문화가 생겨났고, 가게들은 수입이 줄어든데다 원재료비가 상승하고 인건비도 오르면서 부담이 가중됐다. 새벽까지 영업을 해봐야 손실만 커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많던 24시 해장국집이 밤 10시가 되면 문을 내렸고, 밤샘문화의 상징이던 편의점도 24시간 영업을 고수하지 않는 곳이 늘어났다.

여기에 코로나19가 촉발시킨 비대면 소비문화 역시 기존 밤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온라인으로 쇼핑은 물론이고 밤늦게도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을 수 있는 새로운 환경이 제공되면서, 이제 거리로 나가기보다는 집에서 즐기는 문화가 생겨났다. 또 술과 음식에만 집중되던 밤 문화가 게임이나 콘텐츠 시청 같은 온라인 기반의 소비 문화로 채워지는 경향도 생겼다. 즉 밤샘 문화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소비의 양태가 바뀐 것이다. 모두가 그 시간에 다 함께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하는 옛 시절의 밤 문화였다면, 지금은 그 시간에 각자 하고 싶은 것을 취향대로 할 수 있는 다양한 밤 문화가 열리고 있다고나 할까.

달라진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밤문화

대신 최근 새로 생겨난 밤 문화는 오히려 소비보다는 생산적인 투자에 관심이 많은 요즘 세대의 욕망들이 투영되어 있다. 이를테면 최근 늘어나고 있는 야간운동을 할 수 있는 헬스장이나 요가수업 같은 것들이나, 자기계발을 위한 24시간 운영하는 공부카페 같은 것들이다. 자기 관리에 관심이 많은 달라진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밤 문화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처럼 변화하는 밤 문화는 과거 같은 자영업자들 중심으로 밤샘 영업이 이뤄지는 시절의 밤 경제와 비교해보면 전체적으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밤 새워 달리는 문화란 산업화 시절 집보다는 일터를 더 중시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가 일터만큼 집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됐고, 워라밸을 새로운 가치관으로 수용하게 되면서 이러한 밤 문화는 당연한 변화를 맞이하게 됐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주의 문화가 일상이 된 서구의 경우, 밤이 되면 대부분의 상점들은 문을 닫는다. 결국 이들의 밤 문화는 직장 근처나 대학가가 아니라 집 근처로 옮겨간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가까운 펍을 찾아가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그런 문화다. 물론 보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만남을 중시하는 우리가 저들처럼 불꺼진 밤 문화로 변화할 것이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주의 문화와 워라밸의 가치관이 점점 자리할수록 집 중심으로 밤 문화가 변화하는 흐름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일터가 아닌 집에서 밤에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편리하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밤 문화와 밤의 경제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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