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과학부 교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서 스포츠 담당 기자로 근무했으며, 영국 레스터 소재의 드몽포트대(DMU)에서 스포츠 문화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스포츠 문화사> <야구의 나라>가 있다.
1920년에 시작해 올해로 101회째를 맞는 하코네 역전(驛傳, 이하 하코네 에키덴) 마라톤 대회는 그 좋은 예다. 하코네 에키덴은 일본 간토(關東)지역의 대학 선수들이 구간별로 나누어 도쿄와 온천으로 유명한 관광지 하코네를 왕복해 달리는 마라톤 대회다. 요미우리 신문사와 간토 학생육상경기연맹이 공동주최하는 이 대회는 매년 1월 2~3일에 펼쳐져 일본의 신년을 여는 스포츠 대회로 잘 알려져 있다.
하코네 에키덴을 그저 일본 대학생들이 펼치는 마라톤 대회로 치부하면 곤란하다.
지난 1월 펼쳐진 대회의 TV 시청률이 이를 증명한다. 첫날 경기의 TV 시청률은 27.9%였으며, 우승팀이 가려지는 둘째 날 경기의 TV 시청률은 28.8%였다. 21세기가 다매체 다채널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하코네 에키덴의 시청률은 정말 놀라운 수준이다.
하코네 에키덴이 이렇게 인기가 높은 건, 물론 일본인들이 마라톤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간토 지역 대학생들에게 하코네 에키덴은 꿈의 무대이며 놓칠 수 없는 스포츠 이벤트다. 워낙 높은 인기 덕분에 이 지역 대학교는 하코네 에키덴 성적에도 관심이 지대하다. 하코네 에키덴에서 좋은 성적을 기록한 대학교에 입학 지원자가 몰리는 일도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대회가 만들어 내는 효과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은 인구 1만 명 남짓한 하코네 타운(하코네마치 箱根町)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하코네 타운은 온천과 유명 미술관이 있는 휴양지이자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도쿄에서도 가까운 편이라 하코네 타운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2,000만 명 수준이다.
100만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하코네 에키텐 마라톤 대회 ©flickr
하코네 에키덴이 펼쳐지는 2일 동안 하코네 타운에는 약 100만 명의 관광객이 운집한다. 이들은 마라톤 경주를 하는 선수들을 길가에서 보기도 하고 온천 휴양을 즐기기도 한다.
하코네 에키덴 기간에 하코네를 찾는 관광객을 위해 지역 관광협회는 다양한 노력을 해왔다. 무엇보다 하코네 타운의 상점들은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응원 깃발과 메가폰을 준비해 왔다. 이들은 메가폰에 전년도 대회 우승학교의 컬러를 활용하는 전통도 만들었다. 하코네 에키덴을 보러 온 사람이라면 반드시 맛을 봐야 한다는 온천 스튜빵(온천수로 끓인 고기 스튜를 넣은 빵)도 지역의 명물로 인기가 높다.
멀리 보이는 후지산과 함께 아날로그적 감성이 묻어나는 선수 순위 게시판도 하코네 에키덴이 만들어 내는 정겨운 풍경이다. 타운 주민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은 관광객들이 선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할 수 있도록 ‘○○ 대학의 △△선수가 옵니다!’라는 말을 전달하며 대회 분위기를 북돋워 준다. 참가 대학 응원단이 총출동하는 하코네 에키덴은 마치 일본 지역 축제인 마츠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하코네 타운 주민들과 관람객들의 육성 응원은 대회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하코네 타운은 대회를 보기 위해 타운을 방문한 관광객을 대상으로 약 70개소에서 음식이나 상품 가격, 그리고 이용 만족도 등을 매년 조사해 문제점을 개선하고 있다. 하코네 타운은 하코네 에키덴을 통해 유입된 관광객들이 다시 방문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20년 이상 지속된 만족도 조사는 매우 의미가 깊다.
하코네 에키덴의 명물 온천 스튜빵 ©하코네 관광협회 공식사이트
싱가포르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수영장
©aquaticlessons.com.sg
도시국가 싱가포르에서 펼쳐지는 스포츠 대회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대회는 ‘싱가포르 F1(포뮬러 1) 그랑프리 자동차 대회’다. 하지만 생활 스포츠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싱가포르에서 가장 중요한 스포츠 대회는 단연 수영대회다. FINA(세계수영연맹)의 수영 월드컵 국제대회는 물론 중고교 학생들을 위한 대회가 싱가포르에서 끊임없이 개최된다.
1965년에 독립한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엘리트 스포츠 육성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지 않았다. 여기에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는 고(故) 리콴유 전 총리의 생각이 크게 반영됐다. 그는 싱가포르와 같은 소국에서 올림픽 금메달과 같은 성과는 기대하기도 어렵고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한마디로 싱가포르에서 엘리트 스포츠를 육성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라는 뜻이었다.
리콴유 전 총리는 생활 스포츠 활성화에 집중했다. 그 중심이 되는 스포츠는 수영이었다. 물론 수영은 해양 국가 싱가포르에 안성맞춤인 스포츠다. 하지만 리콴유 총리가 수영에 집중한 이유는 ‘스포츠 복지’ 차원에서였다.
싱가포르는 빈부 격차가 큰 곳이었다. 상대적으로 저소득층 국민은 수영을 즐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부는 공공 주택 시설에 수영장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저소득층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수영장 건설 붐이 일어났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독립 당시 싱가포르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에게 수영장은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이런 정부의 노력으로 수영은 싱가포르의 국민 스포츠가 됐다. 싱가포르에는 대규모 공공 수영 콤플렉스만 26개가 만들어졌고 거의 모든 싱가포르 국민들은 수영을 즐기게 됐다.
이런 토대에서 싱가포르는 국제 수영 월드컵 등의 대회를 유치할 수 있었다. 국토 면적이 좁아 간척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던 싱가포르에서 수영장은 이렇게 늘 특별 대우를 받았다. 최근에는 65세 이상 싱가포르 국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소규모의 공공 수영장도 건설됐다. 급격하게 고령화되고 있는 싱가포르 사회의 노인들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수영장 시설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수영에 대한 투자는 수영 스타들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됐다. 엘리트 스포츠 육성은 생활 스포츠의 확산에서 비롯된다는 평범한 교훈이 입증된 셈이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사우스이스트 아시안 게임에서 무려 39개의 금메달을 획득해 ‘골든 걸’이라는 별칭이 붙은 싱가포르 수영의 전설 패트리샤 찬 리인은 수영을 통한 리콴유의 스포츠 복지 정책이 만든 스타였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싱가포르 첫 올림픽 금메달이 나왔다. 이 역시 수영 종목에서였다. 주인공인 조셉 스쿨링은 사실 2013년에 입대해야 했지만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아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싱가포르 도심 곳곳에 지어진 수영장 ©shutterstock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조셉 스쿨링 ©shutterstock
인구 26만 명에 불과한 독일의 중소도시 겔젠키르헨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탄광도시로 이름난 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겔젠키르헨의 탄광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겔젠키르헨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탄광 산업이 그 가치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겔젠키르헨은 1990년대 이후 탄광 도시에서 태양광 도시로 재탄생해야 했다. 대기오염의 주범이었던 석탄의 도시 겔젠키르헨은 이렇게 친환경 도시로 거듭났다. 새롭게 변모한 겔젠키르헨의 성공적인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전문가들이 몰려들었고 이제는 역사적 유물이 된 탄광의 옛 모습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도 이 도시를 찾았다.
하지만 탄광과의 결별을 선언한 도시 겔젠키르헨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공간도 있었다. 바로 겔젠키르헨을 대표하는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클럽 ‘샬케 04’의 홈구장이었다. 이 클럽은 2014년 선수들이 드레싱룸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터널을 마치 탄광의 갱도처럼 꾸몄다.
샬케 04가 탄광의 갱도를 연상시키는 터널을 만든 이유는 분명했다. 분데스리가 클럽 가운데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샬케 04 팬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대부분 광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샬케 04가 1904년 창단된 이후 회원 명부에는 직업이 광부인 팬들이 매우 많았다. 이는 샬케 04의 별칭이 ‘광부들’로 지칭된 이유이기도 했다.
갱도에서 사투를 벌이며 일을 해야 했던 겔젠키르헨의 광부들은 서로 끈끈한 연대감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말에 펼쳐지는 샬케 04의 경기에서 엄청난 함성을 내며 그들의 연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팬들의 단결심으로만 따지면 샬케 04가 세계 최고 축구 클럽이라는 얘기도 여기에서부터 나왔다. 자연스레 샬케 04의 팬덤도 엄청났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가 샬케 04의 홈구장에서 펼쳐질 때보다 샬케 04 클럽의 홈경기 관중 숫자가 많았을 정도였다. 샬케 04는 2023-2024 시즌에 2부 리그 소속이었지만 평균 관중 숫자가 무려 6만 1,388명이나 됐다. 도시의 인구가 26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믿기지 않는 관중 숫자다.
겔젠키르헨의 오래된 광산탑 ©shutterstock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 클럽 ‘샬케 04’의 홈구장 펠틴스 아레나 ©shutterstock
샬케 04는 러시아의 에너지 회사 가스프롬으로부터 후원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바다를 통해 독일까지 연결하는 노르트스트림 계획이 체결되면서 샬케 04가 일종의 혜택을 본 셈이었다. 하지만 샬케 04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이 전해지자 가스프롬과의 후원계약을 곧바로 파기했다. 클럽 재정만 고려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성실한 땀의 가치를 생활신조로 삼았던 탄광 도시 겔젠키르헨의 클럽 샬케 04는 정의와 평화를 선택했다.
이후 샬케 04는 극심한 재정 위기를 겪었다. 샬케 04에 대한 성원이 남달랐던 겔젠키르헨 시민들은 클럽이 갚아야 할 엄청난 규모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그 결과, 클럽 운영 주체와 시민들은 샬케 04를 협동조합으로 새롭게 출범시켰다. 2024년 1월 샬케 04는 클럽의 협동조합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불과 협동조합원 모집 3일 만에 4,000명의 시민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350만 유로(약 52억 4,500만 원)가 모금됐다.
아직 클럽의 부채를 갚기에는 부족한 액수지만 샬케 04는 앞으로 2~3년 내에 목표로 하는 모금액을 모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겔젠키르헨이 탄광 도시에서 태양광 친환경 도시로 바뀐 것처럼 샬케 04도 협동조합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시민들의 굳건한 믿음은 독일을 넘어 유럽에서도 화제가 됐다. 마치 하나의 공동체처럼 긴밀하게 연결된 팬을 확보하고 있는 프로스포츠 클럽이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어떻게 상승시킬 수 있는지 샬케 04가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탄광 갱도처럼 만든 경기장의 터널 ©FC Schalke 04
한국에도 찾아보면 하코네 에키덴과 같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국내대회가 꽤 있다. 싱가포르의 수영 정도는 아니더라도 경북 김천은 여러 수영대회 개최로 한국 수영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으며, 세계조정선수권대회가 열렸던 충북 충주와 동계 올림픽이 개최됐던 강원도 평창도 특정 종목에 특화된 스포츠 도시로 성장 가능성이 높다. 2024년 프로축구 1부 리그로 승격한 FC안양 등 시도민 구단들도 축구로 도시를 알리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 도시를 만들려면 정책적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가능하다. 또한 선택과 집중도 요구된다. 수많은 도시를 스포츠 도시로 모두 키워낼 수는 없다. 이미 스포츠를 발판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왔던 도시와 역사성이 있는 스포츠 대회를 개최하고 있는 지역에 맞춤형 지원을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대중들을 공감하게 만드는 스포츠 도시의 진정한 힘은 찰나의 화려함보다는 전통성과 애틋한 스토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FC안양 등 시도민 구단들도 축구로 도시를 알리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FC안양
충북 충주시의 탄금호 조정경기장. 세계 대회가 열린 만큼 충주는 스포츠 도시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 ©충주시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가 열렸던 강원도 평창군은 스포츠 도시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다.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