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보다 먼저 가는 여행

글. 구지회 사진. 손호남, 이동진

굳게 닫혀 있던 여행의 문이 열리고 있는 요즘, 여행의 설렘을 고조시키는 감각적인 공간들이 주목받고 있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공간의 경쟁력이란 무엇인지 들여다 본다.

33게이트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33gate

#1 PLACE.

출발 전 떨림을 담은 공간, 33게이트

코로나19로 여행이 어려워진 후, 유튜브에서 ‘공항 소리’나 ‘기내 안내 방송 소리’ 영상이 인기를 끌었다. 여행의 설렘과 떠나기 직전의 떨림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기억을 전하는 33게이트를 찾았다.

설렘 유발, 다층적 공간디자인

33게이트의 김신 대표가 여행지가 아니라 공항을 콘셉트로 한 공간을 기획한 데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돼 있다. “저는 도착지보다 공항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설레더라고요. 탑승 게이트 앞에 앉아 한 손에 비행기 티켓을 든 채 꼭 가고 싶은 곳들을 점검하는 시간이 주는, 특별한 설렘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 저뿐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 아이디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의 마음을 훔쳤다. “코로나19로 휴업 중인 중년의 여행사 사장님이 방문하신 적이 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울컥 우시더라고요. 이런 분위기가, 공간이, 기분이 너무 그리웠다고 하시면서요.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공감하는 말일 것 같아요.”

공항에서 느꼈던 설렘을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김신 대표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섬세하고 다층적인 공간 디자인이었다.

“메뉴를 주문하는 바(bar)를 공항 게이트 안내데스크처럼 만드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어설프게 재현하면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거든요. 실제 공항 의자를 설치하고, 콘센트조차 공항에서 쓰듯 전 세계 공용 콘센트를 설치했습니다. 체험도 재현하려고 애썼어요. 전광판에서는 비행 편 정보가, 스피커에서는 공항안내 방송이 흘러나옵니다. 손님들이 특히 좋아하시는 건 기념품인 비행기 티켓이에요! 본인 이름을 기입할 수도 있어서 정말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나죠.”

비행기 티켓의 경우, 33게이트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핵심 아이템이기도 하다. “시즌마다 티켓 속 목적지가 변하고, 그 나라에 맞춰 메뉴 라인업이 변경 돼요. 기본 메뉴가 있되, 파리라면 크루아상, 런던이라면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방콕이라면 리조트에서 맛보던 웰컴 드링크를 추가하는 식이죠.”

33게이트로 떠날 다음 목적지

33게이트는 앞으로 여행 관련 기업과 협력하여 비즈니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카페 창업을 준비하며 공간을 구상할 때, 어떤 브랜드와 어떻게 협업을 하면 좋을지 먼저 생각했어요. ‘테슬라와 협업한다면 전기자동차 충전소를 겸한 카페를 열면 좋지 않을까’라는 식이었죠. 그 아이디어 중 제 자본 규모에 알맞은 형태가 33게이트였어요. 이곳은 향후 대형 항공사와 협업하는 것을 떠올리며 디자인을 했습니다. 협업이 성사된다면 해당 항공사의 티켓과 안내방송을 재현하고, 그 항공사가 홍보하는 노선을 테마로 공간을 꾸밀 계획입니다.” 33게이트가 안내할 다음 목적지를 떠올리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책크인 Ⓐ 서울특별시 마포구
Ⓘ checkin_books

#2 PLACE.

(여행하는 인간)의 책방, 책크인

여행만큼 한 사람의 취향이 총체적으로 반영되는 여가생활이 있을까. 여행 책방 겸 와인 숍인 책크인은 일상과 분리된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의 취향을 체험하며 여행을 그릴 수 있는, 그 자체로 또 다른 여행지 같은 곳이다.

그 자체로 여행지인 공간

책크인을 운영하는 고윤경 대표는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이(異)세계로 초대되는 느낌을 받길 원했다 말한다.

“매일 올리는 오픈 공지 하단에 늘 ‘책방으로 여행오세요!’라는 말을 남겨 둬요. 모든 여행의 시작인 체크인(Check in)처럼, 낯선 도시와 그곳의 음식, 문화, 사람 이야기가 가득한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일상과 완전히 분리돼 어디론가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책방이 자리할 위치부터 신경 썼죠. 시끌벅적한 연남동 중심가에서 다소 떨어진, 가끔 들리는 철도 소리가 정겨운 곳으로요.” 해 잘 드는 통창 앞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즐기는 ‘낮술’이라는 요소도 방문자들이 여행 떠나는 기분이 들게 하는 포인트다.

“이후의 일정도 온전히 내 것이어야 즐길 수 있는 ‘낮술’은 그 자체로 비일상이죠. 이곳에서만큼은 마음껏 나태해질 수 있었으면 해요.” 자신의 일상을 지키면서 떠날 수 있는 가장 가깝고도 먼 곳. 책크인은 그 자체로 ‘여행지’다.

취향을 만나는 공간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하루하루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재미있는 일을 하고는 돌아와, 맛있는 것을 먹으며, 또 재미있는 일을 궁리했던 여행지에서의 그 하루를 재현하기 위해 고윤경 대표는 ‘취향’에 집중하여 책방을 꾸미고 있다. “여행이란 한 사람이 가진 취향의 집약체라 생각해요. 나의 시간과 자본을 들여 방문한 낯선 곳에서 먹고, 보고, 마시고, 자고, 걷는 거잖아요. 각자의 취향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자기 것이 있어야 곧 취향인거니까요. 그래서 이 책방도 누군가의 취향을 따라가거나 제가 취향을 이끌려 애쓰지 않고, 그저 제 취향을 모아뒀어요. 그래야 저도 잘 설명할 수 있고, 손님도 흥미로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책크인의 테마가 가장 잘 드러나는 정책은 ‘얼리(Early) 책크인과 레이트(Late) 책크아웃’ 이다. “책방 오픈 전후 3시간 동안 간단한 식음료와 함께 책방을 즐기실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미리 요청하시면 원하는 음악이나 영화로 공간을 채워드려요. 온전히 나만의 취향으로 가득 채워 이 공간을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죠.”

즐거운 작당이 가득한 여행자의 커뮤니티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책크인은 이제 여행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이고 교류하는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초반에는 여행 서적 판매가 거의 불가능했어요. 여행 준비하러 책을 구매하는 분이 사라졌으니까요. 그런 과정에서 책방은 이제 책만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자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언젠가는 포르투갈과 멕시코를 각각 테마로 하루 종일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 적이 있어요. 테마 국가의 와인 및 핑거 푸드를 맛보고, 그곳을 여행한 여행에세이 작가와 북 토크를 즐기다가, 그 나라의 풍광을 가득 담은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죠. 여기는 한국인데 여행 온 것만 같은 하루였어요. 앞으로도 여행 드로잉 클래스, 와인 테이스팅, 여행에세이 독서 모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더 나아가 제가 여행사(고앤두트래블)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책크인의 결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여행프로그램들 또한 선보일 계획입니다.” 즐거운 일 다음에 또 즐거운 일이 가득하던 여행처럼, 앞으로도 ‘즐거운 작당’이 가득할 책크인이다.

커피 한약방 Ⓐ 서울특별시 중구
Ⓘ coffee_hanyakbang

#3 PLACE.

오래된 미래로 떠나는 여행, 커피 한약방

‘이런 곳에 길이 있을까’ 싶은 을지로 뒷골목에 숨은 듯 자리해 있는 커피 한약방은 다른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곳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여행을 떠나 보았다.

옛 시간에 담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공간

커피 한약방은 서울의 역사 한편에 새겨진 곳이다. 강윤석 대표는 이곳에 문을 연 것부터 운명 같았다 말한다. “명의 허준 선생께서 백성들을 돌보던 ‘혜민서’ 자리에 들어선 커피숍이라 커피한약방인 줄 아는 분이 많으세요. 그런데 사실 저희도 모르고 왔어요.(웃음)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한약과 닮았다는 생각에 이런 이름을 지었던 것인데, 개업 후 우연히 이 자리의 역사를 알고는 순간 전율이 일더군요.”

장소뿐만 아니라, 문화사 측면에서도 이곳은 의미가 크다. 시대에 한 발 앞서 한국의 옛 것이 트렌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하나의 흐름을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9년 전 개업했을 때는 을지로가 지금처럼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곳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번화가인 듯 숨어 있는 소굴인 듯 양가적인 매력이 마음에 들더군요. 자개장 또한, 유행할 것을 예상하고 이용한 것이 아니에요. 당시에는 오래되고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던 자개장이 제 눈에는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서 인테리어에 활용했을 뿐이었죠. 서양 어느 나라를 흉내 내는 카페야 많지만, 먼 곳에서만 아름다움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찾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강윤석 대표가 느꼈던 을지로와 자개장의 매력은 다른 이들에게도 정확히 전달됐다. 그대로 흘러 사라지는가 했던 낡고 소외된 시간이 주류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시간을 잇는 여행지

커피 한약방에는 낯선 과거와 익숙한 미래가 혼재한다. 물건도, 사람도, 건물도 모두 층층이 다른 시간을 한데 잇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물건 중에는 기증 받은 것들이 많아요. 우리 직원 어머님의 혼수품이었던 자개장이 2층을 장식하고 있고, 부모님 유품을 여기에 두고 그리울 때마다 오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추억이 담긴 의미 있는 물건에 새로운 기억이 깃드는 셈이죠. 손님들의 세대도 다양해요. 가게 차원에서 할머니와 손녀,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커피 마시는 풍경을 적극 지원하고 있기도 하고요. 가령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모시고 온 웃어른의 음료를 무료 제공해 드리고 있어요. 40년이 넘은 이 낡은 공간도 다양한 시간을 다채로운 풍경으로 보여줍니다. 낮과 밤의 느낌이 다르고, 계절 따라 다르고, 기후 따라 다르죠. 몇 번을 와도 낯설어요. 제가 생각하는 여행이란 ‘익숙한 것을 흔들어 깨우는 낯섦’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카페는 언제나 새로워 더욱 훌륭한 여행지죠.”

여행을 창조하는 공간

커피 한약방은 새로운 여행을 창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전에는 손님의 약 30%가 외국인이었어요. 인테리어도 그렇지만, 해외 문화인 커피와 디저트를 숙성 커피와 무스 오미자 케이크 등 한국적인 풀이로 탈바꿈시킨 모습이 그네들 눈에 신선했던 게지요. 이렇게 외국인이 많이 찾아주시는 데에 점점 어떤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가게가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재개발로부터 한국의 옛 풍경을 지켜내는 데에도 이바지하고 싶어요. 코로나19가 끝나면 해외 진출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한국이 어느 때보다 활발히 세계에 알려지고 있는 지금,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멋진 여행지가 되는 데에서 나아가 여행지를 창조하려는 커피 한약방. 그 발걸음이 만들어낼 시간이 앞으로도 기대되는 이유다.

CONTENTS : NEO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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