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며 푸른숲 편집장. 전 ‘필름2.0’ 기자이며 <아무튼, 계속>, <오늘도 계속 삽니다>를 썼다. 온라인 미디어인 ‘엔터미디어’에서 ‘어쩌다 네가’라는 칼럼명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해 글을 쓴다.
어쩌면 시간여행이 SF영화 속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산책하기 좋은 요즘, 거리를 거닐다보면 우리가 현재 90년대를 사는지 2022년을 사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전 세계를 강타한 레트로 열풍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수 년째 계속 대중문화, 패션, 식품, 스포츠 등 분야를 옮겨가며 오히려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콘텐츠 업계에서는 2015년 MBC <무한도전>의 ‘토토가’부터 2021년 SBS <문명특급>의 ‘컴백해도 눈 감아 줄 명곡’, 일명 ‘컴눈명’ 프로젝트까지 90년대를 줄기차게 소환하고 있다.
마케팅 업계에서는 서울 익선동과 곰표 맥주, 1970년대 진로병의 하늘색을 그대로 재현해 출시한 진로가 시장을 휘어잡은 2020년이 레트로 마케팅의 정점이라고 선언했지만 그로부터 2년이 더 흐른 지금, 1998년 등장한 포켓몬빵이 골목을 다시 휘어잡고 있다. 20여 년전 ‘띠부씰(띠고 부치고 띠고 부치는 씰)’을 모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하던 부모들은 틱톡과 인스타그램을 하는 자녀들을 위해 동네 편의점이나 대형마트 앞에서 오픈런 한다.
인류사를 바꾼 스마트폰과 모바일 플랫폼 시장에 역행하는 SNS도 재등장했다. 점점 더 짧게 이용가능하고 직관적인 반응을 요하는 SNS가 각광받는 세상에 2000년대 청춘의 우울과 감성을 담았던 미니 블로그 서비스 싸이월드가 많은 성원에 힘입어 지난 4월부터 서비스를 재개했다.
유통업계에서 이런 레트로 마케팅의 성공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롯데제과의 가나초콜릿은 1988년 광고를 재활용했고, 팔도는 1998년 출시했던 ‘뿌요소다’를 24년 만에 재출시했다. 동아오츠카도 오란씨를 40년 전 타이포를 살린 레트로 감성의 리뉴얼 패키지로 내놓았다. 롯데푸드의 경우 90년대 프리미엄 우유 열풍을 일으켰던 ‘파스퇴르 우유 930ml’를 출시 당시 디자인 패키지로 선보였다. 그밖에 지금도 많은 회사들이 아카이브를 뒤지며 다시 꺼내올 기억들을 찾고 있는 중이다.
1988년의 광고를 리메이크한 2015년의 가나초콜릿 광고 영상 한 장면 ©롯데제과 유튜브
20여 년만에 다시 등장해 열풍을 일으킨 포켓몬빵 ©연합뉴스
이런 레트로 무드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바로 패션이다. 이른바 ‘나인티스 무드’라 불리는 90년대를 그리워하는 향수는 리, 마리떼프랑소와저버, 프로스펙스, 노티카, 엘레세 등 90년대 패션을 2020년대 패션 트렌드로 부활시켰다. 국내 최대 의류 업체인 삼성물산은 1990년대 초반 광고에 사용했던 카피 문구와 오리지널 BGM을 다시 사용한 빈폴 CF를 공개했으며, 현대백화점은 백화점 업계 최초로 빈티지 팝업 스토어를 여의도점에 열기도 했다. 힙플레이스의 풍경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96년부터 이듬해까지 연재된 천계영의 만화 <언플러그드 보이> 속 패션이 20여 년이 흐른 지금 만화책을 찢고 서울의 길거리로 나와 활보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 뿌리를 둔 글로벌 기업 나이키와 뉴발란스는 덩크로우, 550, 1600 모델 등 90년대 출시했던 퍼포먼스 농구화, 런닝화 모델들을 차례차례 복원해 Z세대의 패션 아이템으로 재탄생시켰다.
레트로 무드, 복고 코드가 사랑을 받는 주된 이유 중 한 가지는 과거가 주는 위로의 기능 때문이다. 선명해서 우울한 현재와 대비되는 빛바랜 기억은 일종의 행복 판타지를 선사한다.
특히 요즘은 유튜브 등 누구나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는 방송사, 크리에이터, 개인들이 쌓아놓은 거대한 아카이브가 언제든 과거와 접속가능한 환경을 제공한다.
지난 2019년 국내 최대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사흘 만에 20억 원이라는 역사상 최고액을 기록한 ‘달빛천사 펀딩’ 이 대표적 사례다. 2005년 당시 투니버스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달빛천사>를 보고 자란 90년대 중후반생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당시 한국어판 더빙을 맡았던 이용신 성우를 이화여대 축제 무대 위로 초대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떼창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확산되면서 90년대가 아니라 90년대생들이 유년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갑을 열었다.
동아오츠카는 자사 제품으로 뉴트로 스페셜 패키지를 선보이기도 했다 ©연합뉴스
늘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첨단을 좇고 살아온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레트로는 경쟁과 적응과 성장의 피로감을 탈출할 수 있는 직접적인 통로 중 하나다. 낡고 촌스럽게 여겨졌던 것들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고, 시간을 견뎌낸 헤리티지는 더욱 대단한 가치로 다가온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도 “지금의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레트로 트렌드는 더 안정되고, 더 예측 가능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석한 바 있다.
전 세계 레트로 붐을 이끌고 있는 90년대 미국은 정치적으로 냉전시대가 종식되고, 경제적으로는 풍요롭고, 사회적으로는 시트콤 <프렌즈>로 대표되는 X세대의 진보적 가치와 자유로움, 다양성을 반영한 문화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폭발하던 시대였다.
그 때문에 <영 포티, X세대가 돌아온다>에서 인용하자면 “오늘날 메가트렌드는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MZ세대가 발견하고 새로운 것에 여전히 열광하는 X세대가 동참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레트로는 단순히 과거를 곱씹는 추억 이야기는 아니다. 오늘날 레트로는 신선하고, 믿을만하며, 대안적인 스토리텔링이 담긴 브랜딩 혹은 스토리로서 지속가능한 확장을 모색하고 있다. 초등학생들이 ‘포켓몬’ 씰에 열광하는 것과 학부모들의 추억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스마트폰 게임 아이템이 익숙한 친구들에게 오프라인 수집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다. 90년대 패션이 돌아온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부모·선배 세대의 스키니진, 앵클컷 바지에 대한 거부감을 꼽는다. 그리고 레트로 콘텐츠는 현행 제품들과는 다른 감성이라는 희소성의 가치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자동차부터 과자까지, 운동화에서 소주까지 레트로는 추억여행의 감성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이란 차원에서 소비된다.
특히 MZ세대는 K-콘텐츠가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단군 이래 최초의 상황을 공기처럼 접하고 살아온 세대다. 바로 윗세대인 X세대와 달리 문화적인 열등감이나 사대를 찾기 희박하고, 반대로 문화적 자존감이 무척 높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고, 재해석하는 데 능한 이들에게 우리의 옛 모습, 오래된 것들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소스로 보일 수 없다. 예를 들어 많은 서바이벌쇼를 통해 과거 흘러간 대중가요들은 풍요로운 문화적 자산이 되고, 트로트 가수 김연자부터 배우 윤여정까지 기성세대 아티스트들은 레전드로 추앙받는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과 기억 속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거나 평가절하되었던 문화와 시간이 일종의 동경을 담아 ‘레거시’로 발전시킨 것이다. 과거회귀적인 복고 코드와 오늘날 레트로 무드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레트로라는 스토리텔링은 팬의 관심과 사랑의 크기에 비례해 성장하는 스포츠 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동력이자, 스포츠팬들을 사로잡을 확실한 무기가 된다. 관련해 국내 프로 구단들도 몇 해 전부터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레트로 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KBO와 K리그에서 종종 이뤄지는 레트로 유니폼 이벤트가 대표적이다. 지난 5월 첫째주 한화는 KIA타이거즈와의 주말 3연전을 ‘레전드매치’ 이벤트로 진행했다. 두 팀 모두 과거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며, 경기장 내 간판과 티켓 등도 레트로 콘셉트로 제작하고, 송진우, 장종훈 등 팀 레전드들이 시구에 참여해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KIA타이거즈와 한화 이글스가 과거 유니폼을 입고 ‘레전드 매치’를 치렀다 ©KIA 타이거즈 유튜브
레전드 매치에서 착용한 한화 이글스의 레전드 유니폼 ©한화 이글스 홈페이지
전북 현대 모터스도 과거의 유니폼을 입고 레트로 매치를 진행했다. ©연합뉴스
레트로 유니폼 마케팅에 가장 진심인 곳은 아무래도 K리그다. 지난 2015년 수원이 창단 20주년을 기념해 창단 시즌 유니폼, 일명 ‘용비늘’을 한정판매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K리그에는 한정판 유니폼 발매가 하나의 특별한 행사가 됐다. 2017년 4월 23일, 당시 사정으로 인해 전북 현대 모터스의 전신인 전북 다이노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전주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전북과 포항은 그 시절 입던 유니폼을 입고 레트로 매치로 진행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K리그 구단 중 클래식 유니폼과 상품을 제작에 가장 적극적이던 포항은 아예 팀의 최전성기인 1990년대 중후반 사용했던 홈 유니폼을 지금까지 세컨드 유니폼으로 활용하고 있다.
2021년에도 흥미로운 대결이 벌어졌다. 비록 지금은 2부에 있으나 각기 눈부신 역사와 화려한 스타 선수들을 보유했던 K리그2의 전남과 대전이 최전성기 시절 유니폼을 복원해 ‘레트로 데이’ 이벤트를 펼쳤다. 지난 3월 울산 현대도 구단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고 팬들이 이를 즐길 수 있도록 울산의 첫 리그 우승 시즌인 1996시즌 유니폼과 로고를 재해석한 ‘1996 HORANGI 클래식 컬렉션’을 공개해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한정판으로 발매된 레트로 유니폼들이 순식간에 품절됐다.
SSG 랜더스와 삼미 슈퍼스타즈를 모티브로 한 맥주 ©이마트24
울산 현대가 선보인 1996 HORANGI 클래식 컬렉션 ©울산현대축구단 홈페이지
전남드래곤즈가 복원한 최전성기 시절 유니폼 ©전남드래곤즈 홈페이지
유니폼 이외에도 레트로 마케팅의 가능성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국내 프로구단 중 가장 활발한 브랜딩을 하는 SSG 랜더스는 작년 이마트를 통해 야구 맥주 2종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는 SSG가 아니라 인천을 연고지로 삼은 원조 야구단이자 1985년에 불꽃처럼 짧은 역사를 남기고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레트로 콘셉트에 맞게 국내 1세대 수제맥주 브루어리 카브루와 협업하며 스토리라인을 맞췄다. 캔 윗부분에 페일에일임을 강조하는 ‘쌉쌀함을 즐겨라’라는 문구를 넣었는데, 당시 팀의 사정과 팬의 심정을 대입해보면 꽤나 묘한 재미가 있다.
팀의 전통 계승과 연고지와의 유대를 무척 중시하는 해외 선진 프로리그의 경우 레트로 마케팅은 무척 일반적이다. 리그, 구단, 선수 모든 차원에서 활발한 SNS 활동과 팟캐스트를 통해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NBA는 전 세계 프로리그 중 가장 MZ세대에게 호응을 많이 얻고 있다. 그런데 NBA는 젊어지려는 노력만큼이나 헤리티지를 가꾸는 데 리그 차원에서 힘쓴다.
유니폼 스폰서를 맡은 나이키와 협업해 각 팀의 역사와 도시의 특징을 잘 조합한 시티 에디션, 레트로 유니폼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75주년을 맞은 이번 시즌에 한정해 결혼 75주년을 다이아몬드로 기념하는 미국 문화를 반영해 리그 로고를 바꿨다.
또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거나 상품 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를 이어가면서 옛 감성과 매력을 오늘날 버전으로 리뉴얼하기도 한다. NBA는 미국의 100년도 넘은 스포츠 카드 수집 문화를 온라인으로 옮기는 도전에 나섰다. 기존 종이 카드 대신 선수들의 영상 하이라이트로 구성된 카드를 NFT 기술을 적용시켜서 거래하는 서비스 ‘NBA 탑샷’은 MLB 등등 관련 사업이 지지부진한 다른 리그와 달리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주요 팬층인 리그답게 성공적으로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포츠의 역사는 곧 스토리다. 오늘날 레트로 마케팅은 응원하는 이유를 마련해주고, 긍지를 심어주는 무척 중요한 팀 브랜딩이다. 아카이브를 통해 구체적으로 집단 기억을 쌓아가는 스포츠팬들에게 팀의 정체성과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수단이기도 하다. 나아가 해당 팀의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고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올드팬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자기만족적 소비와도 연결된다. KBO는 40주년을 맞았고, K리그의 역사도 39년, KBL도 25년이나 쌓였다. 레트로 마케팅을 펼치기에 부족함 없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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