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한 매력,
B급 문화

글. 김교석

TV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며 푸른숲 편집장. 전 ‘필름2.0’ 기자이며 <아무튼, 계속> , <오늘도 계속 삽니다> 를 썼다. 온라인 미디어인 ‘엔터미디어’에서 ‘어쩌다 네가’라는 칼럼명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해 글을 쓴다.

기존 관공서 채널에서는 볼 수 없는 ‘B급 감성’으로 2019년부터 많은 관심을 모은 충TV. 충TV 외에도 인기를 끌고 있는 숏폼·광고·영화 등에서 ‘B급 감성’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기존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재치와 어설픔, 촌스러움 등의 유머코드를 내세운 B급 감성 콘텐츠의 인기 비결을 알아본다.

<가오갤3> 부터 <닥터 차정숙> 까지

오늘날 ‘B급’은 더 이상 등급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예술, 마케팅, 대중문화 콘텐츠 등의 분야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B급은 주류에 반하거나, 가볍거나(저렴하거나), 원본을 모방하거나 마이너 정체성의 범주가 아니라 취향과 문화적 유희, 나아가 누구나 메인스트림이 될 수 있는 접근성을 뜻한다. 대중문화에 있어 B급과 A급의 경계는 현재 모호하며, 과거의 기준으로 현재 우열을 판단하기 어렵다. 최근 흥행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3> 에서 보듯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정점에 있는 마블 영화의 정체성 중 하나가 바로 B급 유머다.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방송에서도 최정상 댄스가수들이 전국 각지의 축제 무대를 도는 tvN의 <댄스가수 유랑단> , 달나라 토끼를 잡으러 간다는 설정의 <뿅뿅 지구오락실> 을 비롯해, tvN <그림형제> , 티빙 <만찢남> 등 허름한 방에서 아무런 장비 없이 진행하는 침착맨 채널의 키치한 B급 정서를 전면에 내세운 예능이 득세하고 있다. 심지어 MBC 예능국은 아예 ‘하이엔드 B급 제작소’라는 명패를 달고 유튜브 채널 ‘M드로메다’를 만들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2023년 상반기 최고 히트작 SBS <모범택시2> 는 B급 코미디 요소를 강화해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줌마렐라 클리셰를 일부러 과하게 범벅한 JTBC <닥터 차정숙> 도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휩쓴 ‘B급’

주류 평단 반응도 B급에 전향적이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는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7관왕의 위엄을 쌓았다. 무엇보다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영화 표현의 수단이 너무나도 명백한 B급 코드였다는 점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받아들여진다.

59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도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있었다. 넷플릭스가 투자하고 지상파 방송사가 제작한 글로벌 콘텐츠, 나영석 사단의 신규 시리즈, 대세가 된 연애예능의 최고 히트작인 <환승연애2> 등을 제치고, TV부문 예능작품상을 유튜브 콘텐츠 <피식쇼> 가 수상했다. 미국 지상파의 토크쇼를 모방한 그야말로 패러디와 가짜로 이뤄진 B급 코드 토크쇼다. 방송국 밖으로 내몰린 코미디언들이 이 땅에서 본 적 없는 문화적 유희를 코드로 삼은 코미디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표를 행사했다.

광고 및 브랜딩 업계에서 유치함을 내세운 키치 마케팅은 이제 흔한 방법론이다. 평화로운 ‘취해도’에 술고래가 나타났다는 설정의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숙취해소제 ‘깨수깡’, 배우 박성웅의 ‘n행시’ 밈을 활용한 ‘바밤바’, 2015년부터 브랜딩의 일환으로 활용 중인 배달의민족의 ‘배민 신춘문예’, 빙그레왕국 세계관을 창시하고 캐릭터를 만들어 ‘메로나’, ‘투게더’ 등 클래식 제품을 홍보하는 빙그레 등 그 사례가 너무나 많다.

흥미로운 포인트는 이들 B급 코드가 단순히 웃기고 눈길을 끄는 특이함 차원이 아니라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 전략을 근저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상상력, 도전, 창의력 발산한 ‘B급’ 영화

그럼 이쯤에서 B급과 B급의 유의어로 등장하는 키치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B급’은 1930년대 대공황이 강타한 미국 할리우드에서 나온 영화산업 용어다. 당시 극장들은 저예산으로 짧은 기간 동안 만든 영화를 완성도 높은 영화에 끼워 파는 전략으로 관객을 유치했다. 이런 기조가 계속 이어지면서 영화는 거대한 자본을 투입한 영화와 저예산으로 제작하는 영화로 크게 나뉘게 되었고, 이를 A급·B급 영화로 분류해 표현했다. 따라서 B급은 A급이 아닌 저렴함, 비주류를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그러면서 기회도 생겼다. 비교적 자본의 통제를 덜 받는 덕에 B급 영화는 신인 감독이나 작가들이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금기에 대한 도전, 신선한 창의력을 발산하는 실험이 가능했다.

특히 1975년 1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영국의 컬트 뮤지컬을 영화화한 <록키 호러 픽쳐쇼> 는 관습에 반항하는 당대 젊은이들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문화현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B급은 반항, 전복, 도전적 문화 코드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후 90년대에 유년기부터 B급 영화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란 왕가위, 쿠엔틴 타란티노, 로버트 로드리게즈 등 이른바 비디오키드 출신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B급은 반항, 저렴한, 변방의, 가벼움이 아닌 문화적 향유와 애호에 관한 취향을 뜻하는 개념이 강해지며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다움’의 표현이 된 B급 코드

B급과 호환 사용되는 키치(kitsch)도 비슷하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대중들이 귀족 문화, 특히 미술품 수집을 따라하던 풍토에서 나타난 용어로 처음에는 모조품이나 대량 생산된 저렴한 미술품들을 지칭했다. 허나 이 자체를 예술로 승화한 앤디 워홀의 팝아트나 키치 패션이란 용어처럼 현재는 독특한 취향을 반영하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위개념이나 열위의 뜻으로 쓰였으나 개성, 문화적 취향으로 개념이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B급과 키치는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사실, 키치와 B급이 문화적 향유이자 애호를 드러내는 개성과 취향으로 굳어진 지는 오래됐다. 이미 X세대들에게 키치, B급은 구분이 아닌 취향에 관한 이야기였다. 90년대 씨네필들의 호구조사 항목에 “주성치 좋아해요?”가, 2000년대에는 “타란티노 좋아하세요?”가 있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매스미디어의 절대 권력이 약화되고 SNS가 무수히 많은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B급 코드는 애호와 취향, 감수성을 넘어 가능성이란 효용까지 갖게 됐다. 다시 말해 오늘날 B급 코드는 나다움(문화 자양분 + 취향)의 표현인 동시에 주어진 조건과 한계를 넘어서서 누구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접근성에 관한 이야기다.

B급의 신선함, 손쉬움으로… ‘충TV’

그 대표적인 예가 충주시 공식 유튜브 채널인 ‘충TV’다. 담당자인 김선태 주무관은 혼자서 1년 예산 60만 원으로 구독자 33만 명을 보유한 국내 지자체 중 가장 큰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냈다. 김 주무관은 중소도시에서 근무하는 지방직 7급 공무원이지만 충주시·충주시장·국토부장관 홍보는 물론 tvN <유퀴즈 온 더 블럭> 을 비롯한 방송 활동을 비롯해 동아일보 등 사기업 홍보까지 진행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자체가 아니라 수십 억대 예산에 유명 홍보회사 하청, 수십 명의 홍보팀 직원들이 근무하는 그 어떤 대기업 홍보실도 못 이룬 성과다.

충TV의 성공은 공무원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B급 유머가 만든 신선함과 친근함, 그리고 그로 인한 생산과 소비의 손쉬운 접근 덕분이었다.

구독자 30만 명 달성 기념해 제작한 감사 인사 영상을 보면, 관공서 회의실의 공기가 고스란히 담긴 ‘생’ 화면 안에 심장을 발보다 아래에 둔 ‘낮은 자세’라며 책상에 발을 올린 채 의자에 누워 앉아 현대자동차 사원과 7급 공무원의 연봉과 처우를 비교하는 김 주무관이 등장하는 식이다. 별다른 촬영장비도 공간도 캐스팅도 필요 없다. B급 코드와 유머로 버무린 아이디어와 B급이기에 허용되는 러프한 방법론으로 인구 21만의 충주시 인구의 몇 배 이상의 사람들에게, 충주시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록키 호러 픽처쇼

B급은 가장 ‘나’답게 세상과 호흡하는 유쾌하고도 부담 없는 방법으로써 다시 각광받고 있다.

소비자 중심의 변화 속에서 각광 받다

이처럼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 즉 중심부를 향하는 중력이 사라진 시대에 창작과 소비 두 측면에서 접근성은 B급이 오늘날 다시금 각광받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다. 문화콘텐츠가 공급자 중심이 아닌 일반 대중 소비자 중심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B급은 많은 것이 이해되고 용서되면서 열악한 조건과 한계를 상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됐다.

<피식쇼> 를 만든 ‘피식대학’처럼 개인들이 글로벌 기업, 공중파 방송사 콘텐츠를 이길 수 있으며 할리우드 배우와 감독이 홍보를 위해 찾아오는 세상이다. B급은 소비자든 생산자든 손쉬운 접근이면서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해야만 하는 가볍고 작은 시작이 필연적인 이 시대의 화법이다.

앞서 어원을 살펴봤듯이 B급 코드는 소수만이 향유하던 엘리트 문화를 대중들이 향유하는 대중문화로 전환되는 길고 긴 흐름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 B급은 기존의 관습, 논리, 성공 경험에 대한 회의가 싹튼 시대의 유머이자 가장 ‘나’답게 세상과 호흡하는 유쾌하고도 부담 없는 방법으로써 다시 각광받고 있다.

누구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의 감독인 다니엘 콴은 오스카 수상 소감에서 “우리가 이런 상을 받는 것도 정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모든 사람에게는 위대함이 있다. 당신이 누구든 각자의 보석,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말라” 고 했다. 이는 영화의 메시지임과 동시에 오늘날 B급 코드가 갖는 의의와 효용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정상적이지 않은 것,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일지라도 이제 그 기준이란 것은 없으며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애호를, 취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대중에게 내놓을 수 있는 세상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B급 코드에 강하게 끌리는 이유다.

©JTBC ©SBS ©tvN ©롯데칠성음료 ©충TV ©피식쇼

CONTENTS : CULTURE ANT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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