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배려와 경험 …
해외 스타디움이 갖춘 ‘공간력’

글.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 에서 스포츠 기자로 근무했으며, 영국드몽포트대(DMU)에서 스포츠 문화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스포츠문화사> <남북한 축구사 1910년부터 2002년까지> 가 있다.

이제 프로스포츠 경기장은 ‘스포츠만 보는 곳’에서 탈피해 ‘스포츠도 보는 곳’으로 변했다. 이 같은 변화에는 상업적 의도가 다분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타디움이 도시의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도 작용했다. 해외 스타디움에 탄생한 특별한 공간을 소개한다.

스타디움엔 특별한 공간과 배려가 있다

근대 스포츠가 태동하던 시기, 스타디움은 단순한 ‘경기장’이었다. 선수들이 그저 스포츠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후 스타디움은 스포츠의 산업화를 이끈 핵심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돈을 내고 경기를 관람하는 문화에 익숙해져갔기 때문이다.

이에 많은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타디움은 스포츠 팀들의 자본 축적을 위한 필수 요소였고, 스타디움은 자연스럽게 대형화되었다. 스포츠 팀들은 스타디움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를 영입할 수 있었고, 이는 곧 팀 성적으로 연결됐다. 때문에 팬덤의 크기는 특정 팀의 성적과 대체로 비례했다.

20세기 후반부터 스타디움은 일상적 생활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 와중에 스타디움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편안함과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스타디움은 ‘스포츠만 보는 곳’에서 탈피해 ‘스포츠도 보는 곳’으로 변한 셈이다. 이 같은 변화에는 물론, 상업적 의도가 깔려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타디움이 한 도시의 공공재가 되어야 한다는 측면도 작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타디움에는 특별한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분 개폐식 지붕을 설치한 웸블리 스타디움 ©shutterstock

세계 최대 규모의 화장실 갖춘 웸블리 스타디움

웸블리 스타디움은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聖地)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스포츠 토너먼트 대회인 잉글랜드 축구협회(FA)컵이 펼쳐지는 장소이며, 잉글랜드 국가대표 축구팀의 A매치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축구 종가 잉글랜드가 1966년에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곳도 웸블리 스타디움이다.

원래 웸블리 스타디움은 1923년 대영제국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웸블리 스타디움은 2007년 신축된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의 관중 수용 규모는 9만 명이다. FA가 소유하고 있는 이 경기장에서는 각종 행사가 많이 펼쳐진다. 축구와 럭비는 물론 아메리칸 풋볼 경기도 거행된다. 여기에 세계적인 뮤지션들의 공연도 열린다.

웸블리 스타디움의 신축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건축 설계자가 가장 신경을 쓴 공간은 어디일까? 일단 지붕이다. 워낙 비가 자주 내리는 런던의 악명 높은 날씨를 감안해 웸블리 스타디움의 지붕은 부분적으로 개폐가 가능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부분 개폐식 지붕을 설치한 이유는 웸블리의 푸른 잔디를 유지하기 위해 그라운드가 항상 햇빛과 바람에 노출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웸블리 스타디움의 진짜 혁신은 화장실이다. 웸블리 스타디움에는 무려 2,618개의 변기가 설치돼 있다. 웸블리는 전 세계 스포츠 스타디움 중 가장 많은 화장실을 갖춰 놓은 셈이다.

웸블리가 화장실 숫자에 집중한 이유는 명확했다. 웸블리에서 주로 열리는 축구 경기의 특성 때문이었다. 축구는 경기 중에 화장실 갈 틈이 사실상 없다.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오는 사이에 축구 경기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득점 장면을 놓치는 걸 원하는 축구 팬은 아무도 없다.

그러다 보니 축구장 화장실은 전반전이 끝나면 관중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후반전 시작을 못 보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웸블리는 화장실 숫자를 대폭 늘렸다. 화장실의 숫자는 팬들의 축구 경기 관람 경험에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웸블리 스타디움의 화장실 ©flowcrete.eu

그루파마 스타디움의 대형 잔디 주차장

프랑스 명문 축구 클럽 중 하나인 올랭피크 리옹의 홈구장, 그루파마 스타디움은 프랑스 축구에서는 희귀한 존재다.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대부분의 경기장 소유권을 지방자치단체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루파마 스타디움의 경우는 프랑스 축구 클럽 중 극히 드물게도 민간 자본을 유치해 건설, 클럽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이유만으로 그루파마 스타디움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그루파마 스타디움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대형 잔디 주차장 때문이다. 무려 6,500여 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잔디 주차장이 그것이다.

그루파마 스타디움은 리옹 도심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 있다. 클럽에서는 셔틀버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승용차를 타고 오는 팬들도 많았다. 그래서 올랭피크 리옹은 대형 주차장을 건설했다. 팬들이 주차 때문에 고생하지 않고, 경기를 관전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리옹의 주차장 프로젝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지역주민들을 위한 여가와 휴식 공간으로, 잔디 주차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리옹의 잔디 주차장은 주변의 공원, 놀이터와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피크닉 장소가 된 셈이다. 친환경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는 리옹의 잔디 주차장은 주변에 조성된 자전거 도로와 함께 명물이 됐다. 이는 ‘스포츠 스타디움이 공공재’라는 측면을 강조한 결과였다.

그루파마 스타디움의 잔디 주차장 ©Constructionnews.co.u

파르켄 스타디움의 미슐랭 레스토랑, 게라니움

스포츠 스타디움은 약속 장소다. 스포츠 팬들은 친구들과 경기를 같이 보는 것 자체를 즐긴다. 하지만 최근에는 엄청난 스포츠 팬은 아니더라도 경기장에서 약속을 잡는 경우도 있다. 해외 스포츠 스타디움에는 이름난 맛집과 분위기 좋은 펍(선술집)이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스타디움과 잘 안 어울릴 법한 레스토랑은 이제 스타디움에서 빠져서는 안 될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가는 추세다.

그런 점에서 덴마크의 파르켄 스타디움은 특별하다. 프로축구 클럽 FC코펜하겐의 홈구장이며,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가 펼쳐지는 파르켄 스타디움에는 지난해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선정된 게라니움이 위치하고 있다.

파르켄 스타디움 8층에 있는 게라니움은 큰 유리창을 통해 축구 경기도 볼 수 있고,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주변 풍경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미슐랭 3스타 명성에 걸맞은 최상급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자연의 식재료를 활용한 미슐랭 맛집들이 즐비한 코펜하겐에서도 게라니움은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그래서 가격은 비싸지만 이곳을 방문하려는 덴마크 사람들과 해외 미식가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파르켄 스타디움의 게라니움에서 아주 특별한 약속을 잡는 경우가 많다. 연인에게 사랑고백을 하기 위해 또는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을 찾는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곳에서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경기를 우아하게 관전할 수도 있다.

물론 파르켄 스타디움에는 대중적인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경기장에 올 때마다 게라니움에서 비싼 음식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라니움 덕분에 파르켄 스타디움은 덴마크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비싼 가격 때문에 처음에는 스타디움에 어울리지 않는 레스토랑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게라니움의 매출도 계속 상승하는 추세다.

파르켄 스타디움의 미슐랭 레스토랑, 게라니움 ©geranium.dk

스토리가 있는 문화재, 펜웨이 파크와 도쿄 돔

스타디움은 문화재가 될 수 있다. 팬들은 스타디움에서 얻은 오래된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강렬한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스타디움은 매우 오랜 기간 특정 팀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프로스포츠 팀들은 팬들이 기억하는 무언가를 스타디움과 주변에 상징물로 만들어 놓는다. 팬들은 상징물을 통해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을 얻기도 한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는 이런 상징물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좌측 담장에 11.2m 높이로 설치된 펜스, 그린 몬스터다. 그린 몬스터 위에는 특별한 좌석도 마련돼 있다. 레드삭스의 경기를 그린 몬스터 위에서 보는 것은 보스턴 시민들이 꿈꾸는 일이 되었고, 이 좌석의 티켓을 사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우측 담장에는 페스키 폴도 있다. 펜웨이 파크에서는 그린 몬스터가 있는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이 좀처럼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측 페스키 폴을 넘기는 홈런은 자주 나온다. 페스키 폴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가 92m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페스키 폴의 유래는 흥미롭다. 1940~50년대 레드삭스의 유격수였던 조니 페스키는 통산 1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 홈런은 거의 모두 이 우측 파울 기둥을 스치는 홈런이었다. 그래서 페스키 폴(Pesky’s Pol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좌측 담장에 위치한 그린 몬스터 ©shutterstock

보스턴 레드삭스 우측 담장에 위치한 페스키 폴 ©위키미디어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 도쿄 돔에도 중요한 상징물이 있다. 나가시마 게이트와 오 게이트다. 3루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타자였던 나가시마 시게오를 영원히 추억하기 위해 도쿄 돔의 3루 측 입구는 나가시마 게이트로 명명됐다. 또한 세계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왕정치)를 기념하기 위해 도쿄 돔의 1루 측 입구는 오 게이트가 됐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팬들은 나가시마 게이트와 오 게이트를 지나면서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9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광의 시간을 떠올린다. 팬들은 이 찰나의 시간여행을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나가시마 게이트와 오 게이트는 이처럼 도쿄 돔을 단순한 스타디움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문화재로 변신시켜 줬다.

도쿄 돔 1루측 입구인 오 게이트 ©shutterstock

도쿄 돔 3루측 입구인 나가시마 게이트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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