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소비자학 석·박사를 마치고 심리학적 관점으로 소비심리 및 소비행동을 연구한다. <트렌드코리아> 를 공저하며 매년 한국의 10대 소비트렌드를 전망하고 있다. 트렌드코리아>
아무리 정교한 가상공간이라도 실제공간을 이길 수 없다.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힘, ‘공간력’. 소매의 종말이 언급되고 있지만, 매력적인 콘셉트와 테마를 갖추고 ‘비일상성’을 제공하는 공간력은 리테일 최고의 무기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어떤 시각으로 공간을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실린 한 칼럼의 제목이다. 소매의 종말 시대에 많은 공간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간에서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수많은 매장들이 도미노처럼 문을 닫았다.
이러한 위기의 파도 속에서도 많은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특별한 전시관이 있다. 젊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불상 보고 멍때리기’라는 불(佛)멍이란 신조어를 만들고, 기념품이 연일 품절되는 상황까지 일으킨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갑자기 왜 주목을 받게 된 것일까?
답은 공간에 있다. 440㎡로 압도되는 크기의 사유의 방은 어둡고 고요한 공간 안에 오로지 반가사유상 두 점만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을 하나라도 더 보여 주려는 빽빽한 기존의 전시실과는 사뭇 다르다. 유물을 보호하기 위한 유리벽을 없애고 반가사유상 단 2점만으로 드넓은 공간을 채웠다. 사유의 방에는 여백을 통한 비일상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의 힘’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서로 접촉하지 않는 언택트(untact) 트렌드는 공간을 위축시켰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공간에 대한 동경을 더욱 크게 만들어 놓았다. 이제 대한민국은 엔데믹(endemic)으로 접어들며 그동안 억눌려왔던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소비 니즈가 다시 반등하고 있다. 재미를 찾을 수 없는 지루한 공간은 죽고, 자기만의 매력을 지닌 공간은 최고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이 시대에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힘’을 ‘공간력’ 트렌드라 명명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사람을 끌어당기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인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소매유통 입지에 관한 이론 중 허프의 중력모델(Huff Gravity Theory)은 뉴턴의 중력의 개념에 빗대어, 공간의 크기가 클수록 더 많은 고객을 유인하며 고객과 공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매력적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리오프닝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공간의 크기를 키우는 전략보다는 고객과 공간의 거리를 좁히는 전략이 돋보인다. 즉, 작은 소형매장을 운영함으로써 고객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현상이 최근 샤넬·디올·루이비통 같은 명품 브랜드를 비롯해 시몬스·하이트진로·가나초콜릿까지 다양한 브랜드가 시도하는 ‘도심 속 팝업스토어’다. 천편일률적으로 제품을 나열한 지루한 매장들과 달리, 일반 매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이색적인 콘텐츠로 가득 채운 소형 팝업 매장을 도심 곳곳에 세워 고객과의 접점을 높이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브랜드들이 소형 팝업 매장에서 제품을 판매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콘텐츠로 브랜드에 신선함과 재미를 불어넣고, 고객들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서로 공감하고 교류하는 ‘커뮤니티 장’으로서 팝업 매장을 활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작은 공간의 인력을 브랜드의 인력으로 이전시키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이제 오프라인 공간은 브랜드를 경험하는 곳으로 그 역할이 바뀌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샤넬
©시몬스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이 서로 보완되는 ‘연계력’도 매력적인 공간의 필수적 요소다. 최근 디지털 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오프라인 공간의 장점은 그대로 살리면서 현실 공간에서 온라인의 편리함까지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솔루션이 눈에 띈다. 이른바 ‘온-오프 블렌딩 전략’이다.
일례로 맥도날드는 최근 매장 내 메뉴판을 날씨·시간대·주문현황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꾸어 보여주는 스마트 메뉴판으로 교체했다. 데이터를 활용해 오프라인 매장에서 고객의 반응을 극대화해주는 솔루션이다.
2022년 5월, 아마존은 미국에서 최초로 오프라인 패션매장인 ‘아마존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매장에서 전용 앱을 활용하면 인공지능이 고객의 관심사에 맞춘 상품을 추천해주고, 피팅룸을 나가지 않고도 추가로 입어보고 싶은 옷을 앱에서 고르고 전달받아 착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정한 온-오프 블렌딩 전략을 활용한 예라 할 수 있다.
온/오프라인의 이분법적 공간을 넘어 메타버스로의 ‘확장력’도 눈여겨 볼만 하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백화점의 ‘VR 판교랜드’다. VR 판교랜드는 스마트폰을 통해 매장을 360°로 둘러볼 수 있는 백화점인데, VR을 통해 마치 실제처럼 매장으로 이동하고 가상공간에 진열된 상품을 살펴볼 수 있다. 연동된 온라인 쇼핑몰에 접속하면 즉각적인 상품구매도 가능하며, 메신저를 통해 구매상담도 가능하다. 이처럼 기술 솔루션을 활용한 공간력 강화는 앞으로 더욱 성장할 전망이다.
©현대백화점
사람을 모으고 머물게 하는 공간의 힘이 더욱 중요해지는 이때에 프로스포츠 산업은 어떤 새로운 기회요인을 찾아야 할까? 첫째, 공간에서의 ‘달라진 고객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의 상품경제나 서비스경제에서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기능과 혜택이 중요했지만, 지금의 경험경제에서는 제품·서비스·공간 등 브랜드의 모든 요소가 제공하는 ‘놀라움’과 ‘재미’가 더욱 중시된다. 다시 말해, 경험경제에서 소비자는 극진히 대접해야 할 ‘손님(guest)’이며, 판매자는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을 제공하는 ‘연출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스포츠 산업은 우리 공간에서의 ‘고객경험’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간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고객여정(customer journey)의 각 단계를 잘게 쪼개서 분석하여 우리가 가진 공간의 현 상태를 진단해야 한다.
디즈니랜드에서는 고객경험을 고도화하기 위해 그들만의 ‘손님학(guestology)’을 갖추고 있다. 손님학은 모든 서비스를 손님의 관점에서 조직하고 제공하는 전략을 뜻한다. 즉, 특정 공간에 머무는 동안 일어날 서비스의 각 단계를 잘게 쪼개서 맞춤화된 최상의 경험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이는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모든 공간은 공간이 가진 모든 요소들을 통해 탁월한 비일상적 경험을 제공하는 방법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
둘째, 공간의 ‘매체적 특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공간은 단순히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브랜드의 가치를 한층 높일 수 있는 잡지와 같다. 특히 현실 공간은 고객이 직접 보고 만지는 경험을 통해 직접적인 스킨십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혁신적인 공간 마케팅으로 비일상적 경험에 감동한 소비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자발적으로 퍼트리는데, 이를 통해 별도의 광고나 홍보를 통하지 않고도 브랜드의 자본력을 높일 수 있다.
다가오는 엔데믹 시대에 공간의 성공 공식은 분명하다. 결국 ‘소비자는 왜 우리 공간에 오는가’, ‘우리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콘텐츠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한다. 코로나 사태가 끝났으니 자연스럽게 오프라인이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는 위험하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머무르게 하는 공간력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공간만의 힘을 갖추려면 그 출발이자 지향점은 결국 고객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