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공대에서 지속가능 비즈니스 혁신을 위한 창의성을 연구한다. 제품 디자이너 출신으로, 지속가능 디자인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과 삶 모두 의미 있고 신나면서도 그 결과가 자연에게 친절하기를 고민한다. 2020년 서울시 ‘올해의 한 책’으로 선정된 <아무튼, 딱따구리>와 <런던스트리트북>을 썼다.
* Vegan: 고기나 우유, 달걀과 같은 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적극적인 개념의 채식주의자. 먹는 음식에 따라 프루테리언, 비건, 락토 베지테리언, 오보 베지테리언, 락토 오보 베지테리언, 페스코 베지테리언, 폴로 베지테리언, 플렉시테리언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채식주의(Vegetarian)는 고기류와 생선, 해산물을 먹지 않는 식단이다. 동물의 목숨을 해하는 먹거리는 배제하지만, 동물에 힘입어 생산된 우유와 치즈, 달걀 정도는 포함한다. 그런데 이제는 비건(Vegan)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번역하자면 완전채식이라는 뜻으로 채식주의에서 조금 더 나아가 동물에서 비롯된 우유, 유제품, 달걀, 꿀, 젤라틴 등 동물성 식품은 물론 동물가죽으로 만든 제품까지 철저히 배제하는 생활양식이다. 요즘 유럽은 물론 한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서 비건이 점차 퍼져가는 추세다.
비거니즘은 6~7년 전부터 유럽에서 사회적 흐름으로 단단히 자리 잡고 성숙해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이 채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새해가 되면 비건과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January)를 합성해서 새해 한 달 채식을 실천하는 비개뉴어리 운동이 어김없이 등장하고, 대체육으로 만든 버거가 소고기 버거와 함께 메뉴에 등장하며 한국인 눈에는 어설프지만 아시아식 채식 요리가 있는 메뉴도 종종 눈에 띈다. 어느 식당에 가나 최소 2~3가지 채식메뉴를 일부러 갖추고 있고 마트에는 비건 식품 코너가 한자리 크게 차지한다.
이런 추세를 등에 업고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식물단백질이나 실험실에서 길러 만든 대체육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다. 필자가 거주하는 영국에 비하면 드물긴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비거니즘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지구를 위한 채식’이라는 광고문구나 귀리유에 대한 소개가 보이고 서울에는 비건 식당이 모인 동네도 있다는 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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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비인간적 환경에서 밀집사육 되었다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가축들의 동물권이나 성인병, 비만 등 건강의 이유로 비건을 실천하는 이들은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비건 인구, 완전한 비건은 아니라도 채식 지향적 식생활을 추구하는 이가 대폭 늘어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축산업이 기후변화에 끼치는 어마어마한 영향에 대한 자각 때문이다. 기후변화와 고기가 무슨 상관이랴 싶지만 2014년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UN이 설립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한 협의체로 전 세계 수천 명의 과학자가 참여하는 권위 있는 기후변화 기관)에서 발간한 기후변화에 대한 보고서 내용은 우리의 막연한 추측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전 세계 교통수단(총 14%)과 산업현장(21%)의 매연보다도 식량을 생산하는 농업(24%)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총량이 더 많다는 것이다.1) 농업의 전 세계 탄소배출량 중 사람이 먹기 위한 곡물이나 채소의 재배 비율이 29%인데 비해 ▲가축 먹이용 작물을 키울 때 발생하는 탄소와 ▲동물이 직접 뿜어내는 탄소가 53%를 차지한다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2) 게다가 사료용 작물을 키울 땅을 얻기 위한 숲의 대규모 개간 문제가 무척 심각하다. 이렇게 커다란 탄소 발자국을 남기며 생산된 육류 섭취로 인간이 얻는 칼로리의 비율은 전체 식량 생산의 18%에 불과하면서도 면적은 78%를 차지하는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준다.
1) https://www.ipcc.ch/report/ar5/syr/
2) https://ourworldindata.org/environmental-impacts-of-food?country=#breakdown-of-where-food-system-emissions-come-f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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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니즘 확산의 또 다른 이유 하나는 MZ세대 사이에서 널리 퍼진 ‘미닝아웃(Meaning out)’ 트렌드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미닝아웃은 무엇을 소비하는지에 따라 신념이나 가치관이 표출된다는 뜻이다. 2030세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친환경, 비건 지향에 진심인 자신의 모습을 게시하는 등의 태도에서 유추할 수 있다. 건강과 환경을 중시하며 기후위기를 의식하고 비건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의 확산으로 인해 채식 문화, 채식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신세계푸드가 전국 2030세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체육’ 인식 관련 온라인 설문조사에서는 국내 MZ세대 10명 중 7명이 ‘환경을 생각해 대체육을 소비해야 한다’고 답했다. ‘2040년 대체육이 일반 육류 점유율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도 확인됐다.
별 생각 없이 먹던 고기의 생산에서 초래된 기후변화로 인류가 공멸의 위기에 처한 이 어이없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이 반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의 식단은 유제품과 고기를 기반으로 발달해 매 끼니 동물성 식품에 크게 기대고 있다. 애쓰지 않으면 어김없이 매 끼마다 고기나 유제품류를 섭취하게 되니 서구식 식문화가 초래한 기후변화 문제가 크긴 하다.
2018년에 넷플릭스에서 출시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비건에 관한 다큐멘터리 <게임 체인저스>는 비건 식생활이 건강에 유익함을 보여줌은 물론, 운동선수의 역량 강화에도 큰 역할을 하는 사례를 다양하게 비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자전거 선수, 세계에서 가장 힘센 선수 등을 소개하고 고기·생선 같은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의 소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효과, 1주일간 채식을 한 경우 신체능력 비교 등 과학적 근거를 통해 비건의 효과를 보여주었다. 비건 지향 식생활로 바꾼 사람들의 모임도 등장했는데,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니 비건이 누구에게나 일률적인 건강 효과를 낸다면 비약이지만 적어도 ‘풀만 먹는 사람들은 모두 마르고 힘이 없으리라’는 편견은 지울 수 있다.
필자의 학교 동료이자 친한 인도인 친구 라비는 훤칠한 키에 건장하고 당당한 풍채를 지녔다. 라비의 부인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 부부는 태어나서 고기나 생선, 달걀을 입에 대본 적 없는 비건 커플이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 생명을 해치는 것을 최소화하는 힌두의 가르침과 지역의 전통이 삶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덕분에, 얼마 전 태어난 아기도 그렇게 키우고 있다. 다만 소를 뭇 생명의 어머니라 여겨 신성시하는 문화에서 자랐으므로 건강하고 자연스럽게 키운 소의 젖과 유제품은 허용한다. 건강검진 할 때마다 “동물성 식품과 비교해 비건인에게 부족하기 쉽다는 비타민 B12는 한 번도 문제가 된 적 없고, 다만 햇빛이 부족한 영국에 사느라 비타민 D가 부족할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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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가장 채식친화적인 메이저리그 구장으로 선정된 텍사스 레인저스의 글로브 라이프 파크 ©shutterstock
프로스포츠 산업에서도 비건은 중요한 이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제 동물보호단체 PETA는 2019년, ‘가장 채식친화(Vegan-Friendly)적인 메이저리그 구장’을 공개한 바 있다. 1위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글로브 라이프 파크’가 선정됐는데 이곳은 식물성 고기를 생산하는 기업과 손잡고 다양한 채식 메뉴를 선보이고 있었다. 후 순위에 오른 구장들 또한 100% 채식주의자를 위한 매점이나 채식 메뉴를 갖췄다. 이러한 방침은 방문하는 관중의 선택권을 존중해야 더 많은 팬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한국프로스포츠협회가 발간한 ‘2018년 프로스포츠 관람객 성향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프로야구 팬들이 야구장의 개선사항 중 하나로 ‘식음료 메뉴의 다양성 부족과 높은 가격’을 꼽았다. 사정이 이러니 채식주의자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 LA에서는 2019년, ‘모든 공공장소의 식당에 비건 메뉴를 하나 이상 구비하라’는 법안이 발의됐다.
SSG 랜더스 노경은 선수는 지난 2020년, 우리나라 프로선수 중 드물게 채식인으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몸이 좋아졌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결과를 보고 당시 소속이었던 롯데자이언츠는 선수 식단에 채식 식단을 확대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비건을 추구해야할 이유가 다양하고도 명명백백하다. 그렇지만 그동안 맛있게 먹어온 동물성 식품을 완전히 끊는 것은 웬만한 각오가 아니고서야 결심도 쉽지 않기에 회색채식이라는 개념을 제안해본다. 되도록 동물성 식품보다는 채소 위주의 식사를 추구하는 것이다. 한 명의 완벽한 비건이 1년 365일 채식을 실천하는 효과는 7명의 사람이 각각 일주일에 한 번씩(7×52) 실천하는 양과 맞먹는다. 즐길 때는 희생당한 동물에 대한 미안함을 잊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당당하되, 기후위기 완화에 한 끼 한 끼 동참하고 건강상의 유익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나와 주변인을 회색채식에 서서히 초대하고, 채소가 주는 새로운 맛의 즐거움과 가능성에 눈을 뜨면 더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고기 위주의 식단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언젠가 굳이 비건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채식요리를 시도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한식은 채소와 해조류, 버섯, 곡물, 콩류를 다양하고 우아하게 활용하는 세계 최고의 요리법을 갖고 있다. 다양한 재료로 유산균을 섭취하는 김치, 콩을 발효한 장, 온갖 푸른 잎과 줄기를 활용하는 나물, 파, 마늘과 깨, 참기름으로 지방질과 단백질을 보완하는 양념, 곡식과 콩을 활용한 떡 등 세련되고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멸치육수나 생선 한 토막 등 약간의 동물성 식품을 2:8의 황금비율로 곁들여 다양성을 꾀하고 맛과 영양을 끌어올리는 정도로 활용해왔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에 반해 지난 십 수 년에 걸쳐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육식 위주의 외식문화가 팽배해져 오히려 한국에서는 채식이 어렵다는 불만이 터지는 지금의 상황은 안타깝다. 여름에는 폭염, 겨울에는 혹한 등 기후변화가 부쩍 더 가깝게 느껴지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쯤 고기 없는 날로 정해 가족들과 친구들과 회색채식을 실천해보자. 생각보다 다채롭고 풍부한 채소의 세계에 새삼 놀라는 계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여 식당주인에게 채식 메뉴를 찾는다고 일부러 목소리를 냄으로써 특수한 곳이 아닌 일반 식당에서도 활발하게 채식 메뉴가 늘어나는 데에 목소리를 더한다면 더욱 좋겠다. 비건 지향의 회색채식은 나와 너, 지구와 동물을 위한 행동을 가능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