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 산학협력단 창조경제본부장. <포노 사피엔스>의 저자이자 ‘문명을 읽는 공학자’로서, 인문학과 기계공학 등 학문 간 경계를 넘어 4차 산업혁명과 인류문명사적 변화 속에서 비즈니스의 미래를 탐색한다.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시대. 팬덤과 크리에이터들이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해 이전에 없던 문화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며 진화하고 있다. 이 시대, 지속가능한 프로스포츠 산업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대비해야 할 것인가.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를 우리는 뉴노멀(New Normal)이라고 부른다. 쉽게 이야기하지만 사실 매서운 단어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상식과 표준이 모두 바뀌고 리셋된다는 말이니 살벌하다. 실제로 우리는 급격하게 디지털 문명으로 이동해버렸다. 아니, 사실은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문명의 대전환을 진행하고 있었고, 코로나19는 그것을 가속하고 강제화했을 뿐이다.
인류는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생존을 위해 디지털 문명을 선택했다. 그리고 불과 10여 년 사이 모든 표준이 달라졌고, 이제는 뉴노멀의 시대를 살게 되었다. 이제 지구상의 표준 인류는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포노 사피엔스다. 그리고 달라진 표준 인류는 일상의 모든 것을 디지털로 옮기면서 세상의 모든 생태계도 바꾸고 있다. 그 중심에 권력화된 대중, 팬덤이 있다.
디지털 문명의 전환은 단순한 디지털의 활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는 인터넷이라는 상상의 공간에 새로운 대륙을 만들고 이주해버렸다. 가장 많은 인류가 찾는 방송국 유튜브는 결코 방문할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큰 쇼핑몰 아마존도, 한 달에 20억 명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페이스북도, 이제는 당연한 게 되어버린 카카오뱅크도 결코 방문할 수 없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된 애플,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인류의 자발적 이주에 따라 급성장하며, 세계 경제의 생태계 자체를 바꿔버렸다. 동시에 자본과 레거시가 지배하던 시장은 소비자라는 새로운 권력자를 갖게 되었다. 소비자는 다양한 SNS 플랫폼을 통해 활동하며 스스로 강력한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실제로 생태계 전체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혁명적인 변화를 겪은 대표적인 산업이 바로 엔터산업과 방송산업이다.
BTS는 팬덤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아티스트다. 자본도 없는 한국의 작은 스타트업 소속사 출신 BTS는 데뷔 후 방송 출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방탄TV’라는 SNS 방송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온라인 소통을 통해 팬덤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는 그들이 성공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엔터산업에서의 절대 권력인 자본과 방송이 그렇게 놔둘 리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불과 4년 만에 미국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소셜 아티스트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잠깐의 케이팝(K-POP) 유행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올해는 무려 11주간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며, 비틀즈가 세웠던 1960년대 기록을 최초로 깨트리는 보이밴드로 성장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ARMY’라는 팬클럽이다. 글로벌 팬들의 힘은 엄청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한 블랙핑크는 제페토라는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팬 사인회를 열었는데 무려 4,600만 명의 팬들이 사인을 받아가면서 엄청난 광고 효과를 입증했다. 이런 현상으로 엔터기업들은 팬덤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 기업으로의 전환을 발표하고 있다.
방송산업도 마찬가지다. 지상파와 케이블TV가 독점하던 방송 권력은 이제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빠른 속도로 이동 중이다. 특히 파워 유튜버들은 개인의 콘텐츠 제작 능력을 바탕으로 수천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권력자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도 이미 70% 이상의 소비자가 저녁 7시 이후에는 스마트폰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미디어를 선택해 시청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방송 권력이 파워 유튜버라는 크리에이터로 분산된 것인데, 이것이 디지털 문명의 대표적인 특징인 탈중앙화(Decentralization) 현상이다. 엔터산업에서 자본과 방송이라는 중앙 권력이 팬덤으로 이동했다면 방송산업에서는 크리에이터 개인으로 이동한 셈인데, 실제로 파워 유튜버를 키운 건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준 소비자인 만큼 방송 권력도 팬덤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 모든 중심에 달라진 표준 인류, 포노 사피엔스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오징어 게임>도 바로 인류의 선택이 보여주는 강력한 추천의 힘의 결과다. 넷플릭스 서비스 국가 83개국 전체에서 1위를 올킬한 <오징어 게임>은 경험한 소비자들의 열광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과거에는 거대한 자본, 방송과 영화관이라는 시스템을 장악한 중앙 권력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크기의 성공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의 드라마가 미국의 할리우드를 위협할 유일한 존재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우리 콘텐츠 산업이 탄탄한 글로벌 팬덤을 만들었다는 증거다. 디지털 문명 시대에는 팬덤이 가장 강력한 자본이고 권력이다.
프로스포츠는 전통적으로 소비자의 팬덤을 기반으로 성장한 산업이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디지털 문명 시대에 잘 맞는 산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제는 팬덤을 만드는 기준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는 것이다. 우선 도덕적 잣대가 매우 높아졌다. 과거에는 별 문제가 없던 스포츠 스타의 인성 문제나 어렸을 때의 학교폭력 문제 등이 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많은 스타들이 필드를 떠나야 했다. 또 방역수칙 위반, 음주운전, 승부조작 등 과거에는 잠깐 떠들다가 잠잠해지던 문제들이 이제는 오랫동안 팬들의 뇌리에 남아 선수들을 힘들게 한다.
프로선수들에게 높은 수준의 휴머니티를 요구하는 것은 디지털 문명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이다. 모두가 권력자가 된 사회에서 비인격적 행동을 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디지털 플랫폼에서 비밀로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숨 막히는 일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팬덤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무거운 짐이 되었다. 팬덤을 만드는 것은 콘텐츠의 퀄리티지만 그 기반은 좋은 인성과 휴머니티다. 그리고 크리에이터의 변하지 않는 진정성을 먹고 자란다.
고객과의 공감대가 커지면 팬덤의 크기도 증폭된다. 16년간 국가대표를 지내며 열심히 실력을 키우는 것은 물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인배 인성으로 거대한 팬덤을 형성한 김연경이 대표적이다. 축구나 야구처럼 인기 스포츠 분야도 아닌데다 올림픽 메달을 딴 것도 아닌데 국민 모두가 열광한다. 심지어 글로벌 팬덤까지 폭발한다. 성적이 아니라 공감이 팬덤을 만든다. 휴머니티와 진정성이 만들어내는 공감대는 팬덤 성장의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다. 인간의 생각은 다양하고 그걸 바라보는 시각도 매우 미묘하며 주관적이다. 그들 모두의 공감대를 만드는 것은 어렵고 또 어렵다. 그래서 스포츠 스타에게는 실력과 함께 마음 속 깊이 인간답게 살겠다는 열망과 진정성이 심어져 있어야 한다. 공감은 오랜 정성으로 피는 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문화 팬덤 보유국이 되었다. BTS와 블랙핑크뿐만 아니다. 유튜브 조회수 세계 1위는 94억 뷰를 훌쩍 넘긴 스마트스터디의 ‘아기상어’ 뮤비가 차지했고, 웹툰 세계 1위 플랫폼으로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경쟁 중이다. 그 힘은 넷플릭스로 이어져 <D.P>의 히트를 만들더니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를 뒤집어 버렸다.
이미 2020년 우리는 소프트파워 랭킹 세계 2위를 기록하며 엄청난 문화강국으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시장도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스마트스터디의 가치가 4조 원에 이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BTS를 보유한 하이브의 시가총액은 10조 원을 훌쩍 넘었다. 지난해 가장 많은 돈을 번 웹툰 작가의 수입은 128억 원이라고 한다. 넷플릭스의 웹툰 투자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팬덤이 커질수록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문화 팬덤이 할 수 있다면 스포츠 팬덤도 할 수 있다. 디지털 신대륙에서는 고객의 팬덤이 가장 강력한 자본이다. 프로스포츠 시장도 문화 콘텐츠 시장 이상의 엄청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실력이다.
팬덤을 만드는 실력의 기준은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8억 명의 거대한 팬덤을 통해 압도적인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한 애플은 기술이 아니라 고객의 ‘느낌적인 느낌’이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스티브 잡스는 그 비결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휴머니티와 인문학을 기술과 결혼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고객의 심장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팬덤을 만드는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고객의 심장이 노래하기 시작할 때, 그들의 자발적 마케팅을 통해 디지털 신대륙을 타고 팬덤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고객의 심장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팬덤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에 감동한다. 감동한 고객은 팬덤을 형성하고, 그 힘은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한다.
스포츠 팬덤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객을 감동시키는 기술뿐만이 아니라 따뜻한 스토리와 휴머니티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 그리고 오래 인내해야 한다.
프로스포츠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동시에 국경도 언어도 장벽이 되지 않고 있다. 특히 MZ세대는 이런 디지털 신대륙 문명에 익숙하다. EPL이든 NBA든 MLB든 가리지 않고 소화하고 전 세계와 함께 열광한다. 그리고 우리의 프로스포츠는 그들의 열광을 이끌어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되었다. 우리 영화와 드라마도 똑같은 우려와 위기를 뚫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출발은 신대륙에 대한 도전이었다.
웹툰 플랫폼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한 신인작가들의 등장 때문이었다. 과거에는 만화가가 되기 위해 유명작가 화실에서 10년을 심부름을 해야 했지만 플랫폼은 ‘조회수 1등이 무조건 1등’이라는 공정한 게임을 실천했고, 이를 통해 엄청난 작가들이 화수분처럼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생태계를 통해 대한민국의 글로벌 문화 팬덤이 탄생한 것이다.
프로스포츠가 성공하려면 디지털 신대륙의 새로운 룰을 적용해야 한다. 모든 권력의 중심은 고객이고, 그들의 심장을 울리는 실력만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모든 성공한 크리에이터가 그러하듯 프로선수도 휴머니티와 진정성의 기초를 탄탄히 갖춰야 한다. 스포츠 기술자로 키워서는 고객의 심장을 울릴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프로스포츠를 팬들의 심장을 울리게 하는 새로운 생태계의 룰에 따라 디자인해야 한다. 실력은 세계 최고를 지향하고, 기초는 휴머니티와 진정성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디지털 신대륙에 상륙하라. 그것만이 이 땅에 프로스포츠의 꽃을 피워내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