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 OTT에 대해 산업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 등 다각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미디어, 문화 산업 및 문화적 현상으로서 미디어 소비에 관한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은 최근 10여 년간 정치·경제·사회·문화 관련 분야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가장 큰 흐름 중 하나이다. 영상 산업도 예외는 아니다. 디지털 전환으로 인해 각종 디지털 플랫폼에서 유통되는 영상의 양은 아날로그 시절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늘어났다. 특히 OTT는 거리두기가 적용되던 코로나 기간 동안 이용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성장한 만큼 OTT 산업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체감하는 시기도 빨리 찾아왔다.
글로벌시장에서는 넷플릭스·아마존 프라임·디즈니플러스 등이 치열한 가입자 확보 경쟁을 펼쳤고, 국내에서는 넷플릭스·티빙·쿠팡플레이·웨이브·디즈니플러스 등이 시장을 주도해 왔다. 하지만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넷플릭스만이 흑자를 내는 OTT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OTT가 흑자를 내기 어려운 이유는 콘텐츠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OTT 사업자가 신규 가입자를 유인하고 기존 가입자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콘텐츠 투자가 필수적이다. OTT가 산업으로서 가지고 있는 구조적 한계는 낮은 요금 등으로 인해 수익을 창출하기는 어렵고 콘텐츠 수급에 필요한 비용은 높다는 것이다.
OTT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는 영화·드라마·예능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OTT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스포츠와 애니메이션이 기존의 장르들과 더불어 중요한 경쟁 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다.
스포츠는 팬덤이 형성되어 있는 리그의 경우 신규 가입자를 확보하는 데 유용하고 체류시간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티빙은 국내에서 두터운 팬덤을 확보하고 있는 KBO의 유무선 중계권을 확보한 이후 이를 동력으로 가입자를 늘려나가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스포츠 장르와는 다른 측면에서 높은 팬덤을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편적인 소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장르는 특정 종목의 팬에 팬덤이 국한된다는 특징을 지니지만 애니메이션은 스포츠와 비교할 때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원작 만화 등 상호 참조할 만한 텍스트가 많다는 점도 애니메이션 장르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다.
©넷플릭스
©티빙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열풍은 원작 만화의 팬덤에서 촉발된 것이었고, ‘슬램덩크’ 시리즈를 제공하는 넷플릭스, 왓챠와 같은 OTT 사업자들에게도 극장 흥행 등 관련된 콘텐츠의 성공은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왓챠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이후 원작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이용 시간이 12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3 애니메이션산업백서>에 따르면 ‘슬램덩크’ 시리즈는 2023년 OTT를 통해 가장 즐겨 시청한 작품 3위(9.4%)를 차지, <더 퍼스트 슬램덩크> 효과를 톡톡히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애니메이션은 ‘원작 만화’, ‘극장 개봉 영화’, ‘TV 시리즈’, ‘OTT에 유통되는 영화와 시리즈’ 등 서로 간의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장르다. IP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이다.
OTT 이용자들이 토로하는 불만은 돈을 내고 구독하는 OTT 서비스에서 볼만한 콘텐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드라마, 예능 중심 콘텐츠 구성에 대한 피로감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애니메이션은 OTT 플랫폼이 안정적으로 이용자를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장르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OTT에서 애니메이션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극장가에서도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선전하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2>는 15.6억 달러의 글로벌 수익을 올렸고 디즈니가 흑자로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인사이드 아웃2>는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어내며 8월 13일 기준으로 869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2023년 국내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면 상위 10편 가운데 애니메이션이 3편이나 포함되어 있다. 3위를 기록한 <엘리멘탈>이 724만 명, 4위를 기록한 <스즈메의 문단속> 557만 명, 6위를 기록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488만 명의 관중을 동원한 바 있다.
높은 충성도를 기반으로 국내에서도 OTT가 애니메이션을 이용하는 주요한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넷플릭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수급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글로벌시장에서 대한민국 드라마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재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한 측면이 있다. 넷플릭스는 애니메이션 오리지널뿐 아니라 <하이큐!!>, <귀멸의 칼날>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구매하여 플랫폼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애니메이션 플랫폼으로 라프텔의 선전이 돋보인다. 넷플릭스가 글로벌시장을 겨냥한 애니메이션 콘텐츠 수급에 주력하면서 국내 OTT 시장에서 경쟁력을 제고해 왔다면, 라프텔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마니아 시장 중심으로 콘텐츠를 확보하여 틈새시장을 공략하고 있다(출처: <2023 애니메이션산업백서>,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 라프텔은 2023년에 누적 가입자 수 500만 명을 돌파한 데다 MAU(월 이용자 수)도 100만 명을 넘어섰고, 매출액도 239억을 기록하며, 국내 OTT 플랫폼 중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OTT가 애니메이션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면, 애니메이션 산업 입장에서도 OTT는 가장 중요한 유통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 <2023 애니메이션산업백서>에 따르면 90.8%의 이용자가 OTT를 통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를 통해 OTT가 애니메이션을 이용하는 주요한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OTT는 근본적으로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플랫폼이다. 그런 측면에서 시대와 문화를 초월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은 OTT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부합하는 장르라고 할 수 있다. OTT 사업자들은 앞으로도 경쟁력 있는 애니메이션 콘텐츠를 수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모두에게 친숙한 장르였지만 OTT에 의해 재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애니메이션 입장에서도 OTT는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애니메이션을 유통시키는 가장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OTT에 의해 재발견된 애니메이션은 앞으로도 OTT에서 제공되는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될 것이며, 더욱 다양한 애니메이션이 OTT를 통해 제공될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OTT를 시청하는 구독자 수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경쟁이 격화되고 성장이 둔화된 OTT 시장에서 애니메이션은 이용자들의 OTT에 대한 만족감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출처: <2023 애니메이션산업백서>, 문화체육관광부·한국콘텐츠진흥원,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