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게 돌아온
스탠딩 컬처
서서 마시고, 서서 즐기다

글. 박찬일

셰프 겸 작가. 기자 출신으로 이탈리아 요리를 전공하고 <곱빼기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 <노포의 장사법> 등 요리와 식당, 음식 문화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의자 없이 선 채로 술이나 커피를 간단하게 즐기는 스탠딩바가 점차 늘고 이런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MZ세대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문화로 여겨지지만 사실 스탠딩 컬처는 오래 전부터 국내외에서 이어져 오고 있었다. 불편을 감수하고 찾게 되는 스탠딩바의 풍경은 어떠하며, 매력은 무엇일까?

앉거나 서거나, 선택은 자유지만 가격은 달라

이탈리아에 누군가 여행 간다고 할 때, 사전 정보를 준다면 다른 건 다 놔두고 ‘바르’(bar)에 가서 함부로(?) 앉지 말라고 조언한다. 바르란 이탈리아, 프랑스 등 중부 유럽에서 술집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커피를 주로 마시는 카페를 뜻한다. 아침부터 크루아상을 곁들여 카푸치노나 카페라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가게다. 이런 가게는 두 가지 가격 정책이 있다. 서서 마시는 게 기본 가격, 앉으면 두 배 내지 세 배, 심지어 대여섯 배도 받는다. 이탈리아인에게 커피는 일상의 음료다. 하루 서너 잔씩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아침에는 우유를 탄 것을 먹기도 하지만 하루 중간중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쉰다. 위염이나 불면증 등으로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을 위한 ‘가짜 커피’ 시장이 연간 수천억 원 된다는 나라다. ‘테 오르초’라고 해서 볶은 보리차를 곱게 갈아서 커피맛이 나도록 만든 것인데, 결국 얼마나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유사 커피라도 마시려고 하는지 짐작이 간다.

하여튼 앉아 마시는 커피는 비싸므로 서서 마시는 게 대부분이다. 에스프레소라는 커피도, 오래 앉아서 마시지 않고 탁 털어 넣고 떠나기 좋은 커피다. 일반 아메리카노는 85℃ 이상으로 뜨겁게 나오지만, 에스프레소는 온도가 훨씬 낮아서 혀를 데일 염려도 없으니 금세 마실 수 있다. 커피 문화 자체가 이렇게 서서 마시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다. 신문을 보거나, 다리 불편한 노인이거나, 다리쉼을 하기 위한 사람을 위해 테이블도 있다. 동네는 대개 추가요금을 받지 않지만, 관광객이 몰리는 동네는 무조건 더 비싸다.

이탈리아의 바는 ‘방코(banco)’라는 카운터에서 서서 마신다. 키높이에맞춰서 설계되어 있다. 캐시어에 주문을 하고, 영수증을 받아서 방코 건너편의 바리스타에게 영수증을 보여주며 원하는 커피를 말하면 된다. 그리고는 받아서 서서 마신다. 크루아상과 카푸치노도 이렇게 서서 먹는 게 보통이다. 바르에선 보통 샌드위치(파니노)를 파는데, 이것도 대개는 서서 먹는다. 내가 알기로는, 베네치아 산마르코의 역사적인 바르, 1720년에 생긴 카페 플로리안에서 에스프레소 달랑 한잔 앉아서 마시면 6유로가 넘는다. 라이브 공연이라도 하면 엑스트라 차지 6유로를 더 내야 한다. 물론 이 카페도 서서 마시면 2유로 정도다. 건너편의 카페는 더 싸다. 커피는 필수품이고, 시민은 누구나 마실 권리가 있다는 개념이다. 당연히 싸다. 대신 앉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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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라는 커피도, 오래 앉아서 마시지 않고
탁 털어 넣고 떠나기 좋은 커피다.
커피 문화 자체가 이렇게 서서 마시는 것으로
세팅되어 있다.”

도시 문화에서 파생된 라이프 스타일

바르만 서서 마시고 먹는 건 아니다. 거리의 간단한 스낵도 서서 먹는다. 파니노 같은 샌드위치나 튀김, 피자도 서서 먹는다. 서서 먹는다는 건 경제적이며 하나의 문화인데 생각해보면 그 사회의 특성이나 역사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얼른 먹고 일하고, 이동해야 하는 바쁜 도시 문화에 어울리는 형식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길거리 음식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떡볶이, 순대, 어묵 등을 파는가게는 여지없이 서서 먹으며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열광하는 문화 중에 바로 이 ‘서서 먹는 간이 음식’이 들어간다. 서서 먹는 건 훨씬 경제적이며 가게의 입장에서도 작은 공간에서 더 많이 팔 수 있어서 ‘윈윈’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앞에 있는 떡볶이집은 상당수가 서서 먹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되는대로 팔을 뻗어 불판에서 익은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먹고, 나중에 먹은 개수를 ‘양심적으로’ 말하고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은 앉아서 먹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많은 식당이 우스갯소리로 ‘철푸덕자리’라고 하는 좌식 탁자를 여전히 운영한다. 하지만 서서 먹는 문화도 여러 모습으로 존재한다.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게 이름 중에 ‘서서갈비’라는 게 있다. 실제로 들어서면 서서 먹지 않고 앉아서 먹는다. 하지만 이런 명칭이 붙은 원조 가게는 여전히 서서 먹는 갈비집이다. 신촌로터리에 있는 연남서갈비(보통은 원조 서서갈비라고 부른다)가 그집이다. 이 집은 한국전쟁 와중에 생긴 후 사람 키높이의 드럼통 구이판에 서서 먹는 걸로 유명하다. 명물 가게로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온다. 주인을 예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50, 60년대만 해도 서서 먹는 가게가 많았다”고 회상한다. 이를 선술집이라고 불렀다. 선술집의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서서 먹는다고 하여 그리 명명되었을 확률이 높다. 우리 표준국어대사전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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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bar)는 원래 술집 주인과 손님 사이를 가르는 키높이의 나무판자를 의미하므로 이미 서서 마시는 집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앉아 마시는 경우도 늘고, 서서 마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스탠드바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역시 앉아 마시는 걸 선호하는 손님들의 요구에 따라 ‘앉아서 마시는 스탠딩바(?)’라는 희한한 업태로 변하고 말았다. 서서갈비가 단 한 집만 빼놓고는 전부 앉아서 먹는 것처럼 말이다(대략 전국에 서서갈비라는 상호는 200곳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목로주점 이래 우리 역사의 스탠딩 컬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대전발 0시 50분~”

가왕 조용필이 불러서 80년대 크게 히트했던 이 노래는 대전역에서 남쪽으로 떠나는 실존하던 완행열차를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졌다. 대전역은 경부선, 호남선이 갈라지는 기점으로 엄청난 열차 통행량이 있었고, 승객도 몰렸다. 요즘은 고속열차가 대부분이고, 일반열차도 오래 정차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이십 분 이상 정차하는 경우도 흔했다. 이때 승객들이 쏟아져 나와서 가락국수 파는 집으로 내달렸다. 큰 역에는 플랫폼마다 이런 국숫집이 있었다. 그중 제일 유명한 것이 바로 대전역이었다. 대전역은 가장 최근까지도 플랫폼에 저런 형태의 서서 먹는 국숫집을 운영했고, 지금도 역의 역사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이밖에도 중앙선은 원주역이 서서 먹는 가락국수로 유명했다.

우리 역사에서 선술집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 것은 개화기, 구한말로 본다. 이때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하면서 도시 곳곳에 선술집이 섰다. 당시 대중 주점의 형태는 몇 개로 나뉜다. 선술집은 말 그대로 서서 마시는 간이술집으로 술을 시키면 안주는 간단한 것을 공짜로 제공했다. 이 문화는 지금도 남아 있어서 지방의 여러 시장에 있는 선술집은 앉아서 마시더라도 안주를 공짜로 주는 관습으로 굳어져 있다. 목로주점이라는 것도 조선후기에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개화기 이후 크게 번성했다. 목로란 나무널빤지를 뜻한다. 손님이 앉는 등받이 없는 기다란 간이의자이기도 하며, 안주를 놓는 목판이기도 했다. 미리 만들어준 안주를 진열하여 빨리 먹고 갈 수 있도록 설계된 주점이다. 나중에는 선술집의 의미가 대중적인 술집을 대표하게 되면서, 꼭 서서 마시지 않아도 선술집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목로주점은 현재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다. 대폿집, 선술집, 실비집 등이 두루 쓰이면서 한국의 대중 술집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일본은 90년대에 경제 버블이 붕괴되면서 사람들 지갑이 쪼그라들었다. 이때 값싼 술집 문화가 크게 퍼졌다. 선술집, 즉 서서 마신다는 의미의 ‘다치노미(立ち飲み)’가 도시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졌다. 주로 오사카가 이런 집들이 많고, 인기도 높다. 하나의 젊은이 문화로 확장되어 과거 어른들의 다치노미와는 다른, 서서 마시면서 주변의 손님과 친교하는 형태로 변하고 있다. 이런 일본식 선술집은 서울에서 생겨났는데, ‘힙지로’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 개업한 을지로의 ‘스탠딩바 전기’가 그것이다. 이탈리아풍의 샌드위치나 커피를 서서 마실 수 있게 설계한 가게들도 서울에 선보이면서, 서울은 바야흐로 새로운 문화가 꽃피울 조짐이다. 이는 한국 전래의 선술집 문화와 연계된다고도 볼 수 있어서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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