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내러티브,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시대

글. 이동은

가톨릭대학교 미디어기술콘텐츠학과 교수. <스토리 유니버스> 저자. 미디어가 진화하면서 변화하고 있는 스토리텔링 기술에 주목하여 그 속에서 인문학적 가치를 찾는 연구와 교육, 그리고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소비자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내러티브. 이제는 물건을 사고, 음악을 들을 때에도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게 됐고, 기업과 브랜드는 내러티브 전략을 잘 활용하면 열렬한 팬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모든 스토리텔링이 돈이 되고 권력이 되는 새로운 시대! K-콘텐츠로 대표되는 작품에서 ‘이야기의 힘’을 발견하여 내러티브 전략을 이해해 보고, 다양한 미디어 기술과 만난 내러티브 전략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지 전망해 본다.

우영우가 일으킨 기적 같은 일

최근 21마리의 수족관 돌고래들이 바다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수족관 돌고래의 해양 방사 결정은 2013년에 방사된 제돌이, 춘삼이 이후 거의 10년 만에 일이다. 제돌이는 2009년 제주 바다에서 불법 포획된 이후 서울대공원에서 돌고래쇼를 해왔던 돌고래다.

하루에 100km씩 헤엄쳐야 하는 동물을 수족관에 가두는 일은 분명 비인도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는 인간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멸종위기종인 돌고래를 상업적으로 활용했다. 여러 동물보호단체와 환경운동연합,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는 돌고래의 방류를 주장하는 캠페인을 수년간 지속해왔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맞물려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기 때문에 21마리의 수족관 돌고래를 방류하겠다는 해양수산부의 최근 결정은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때문이다. 이 작품은 0.8%의 시청률로 출발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여 17.5%라는 기적의 시청률로 마무리한 드라마다. 넷플릭스에서 비영어권콘텐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우영우는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폐증후군을 가진 변호사다. 사람들과의 평범한 소통이 낯설고 어려운 그녀는 ‘고래’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녀의 고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회사 동료와 썸을 타면서 고래의 전시 체험 공연을 멈추라는 피켓 시위를 하고, 고래를 보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한다. 자신을 ‘낯선 바다에서 낯선 흰고래들과 함께 살고 있는 외뿔고래’로 표현하는 그녀를 보며, 시청자들은 고래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이번 에피소드에는 어떤 히스토리를 담은 고래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하는 것 또한 드라마를 보는 재미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내러티브 vs 정보… 기억하게 하는 힘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고래에 대한 대중의 인기도 한층 높아져 고래와 관련된 소품들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무엇보다 고래에게 자유를 되돌려줘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고양되고 있다. 21마리의 수족관 돌고래들의 방류 결정이 바로 그 반증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의 힘이다. 내러티브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어떤 일을 하는 데 동기를 부여하며 실행이라는 구체적인 행위까지 이끌어내는 그런 힘 말이다. 내러티브와 정보의 차이는 이 힘에서부터 비롯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정보’는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전달된 그 순간부터 내용의 유용성과 생명력의 쇠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뉴스들, 그리고 수많은 지식들이 그렇게 빨리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현상을 떠올리면 정보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내러티브는 정보와 다르다. 내러티브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적인 체험을 유발시킴으로써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특성을 갖는다. 오랜 시간 기억되게 하여 내용의 생명력과 유용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러티브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기업과 브랜드들은 내러티브 기술을 활용하여 홍보, 마케팅 전략을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다. 제품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내러티브와 결합시킨다면 정보의 장기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를 잡고 어떤 일을 하는 데
동기를 부여하며, 실행까지 이끌어내는
힘을 갖고 있다.”

새로운 내러티브 혁명의 시대

내러티브는 진화한다. 구술문화에서 시작한 내러티브는 디지털 기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 예술은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필사문화의 시대로 진입했다. 발화하는 순간 사라지고 마는 말과 달리 문자는 내러티브를 저장하고 소유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각종 계약서, 각서, 심지어 반성문이 바로 그 반증이다. 증거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갖는 글은 말보다 높은 신뢰성을 갖게 되었고, 누가 봐도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명확한 규칙과 표준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글을 익히게 된 인류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기록하고 전하는 문화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이후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내러티브는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소수의 지식인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지식과 정보는 대량으로 복제되고 유포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힘을 증가시켰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등장하게 된 것도 인쇄기술의 발명 덕분이다. 내러티브를 향유하는 방법도 달라졌다. 책을 읽는 독서 문화, 읽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개인화가 진행되었다.

인쇄문화시대를 지나 시각 중심의 전기문화시대가 시작된다. 내러티브에 이미지가 더해져 만화나 사진 미디어를 활용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동영상이라는 신기술이 더해져 텔레비전과 영화라는 미디어가 출현하였다. 내러티브는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더욱 다채로워졌다. 상상하던 모든 내러티브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덕에 우리는 풍요로운 이야기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기술력을 갖춘 내러티브의 전파 속도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되었다. 식량을 수집하던 인류는 이제 내러티브를 수집하는 문화인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산기로 출발한 컴퓨터가 멀티미디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면서 인류는 새로운 내러티브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컴퓨터를 활용한 저작도구들의 탄생은 창작 주체의 대중화라는 결실을 만들어냈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비로소 열린 것이다. 특히 작품을 배포하고 유통,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은 창작자에게 경제적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내러티브 생태계 혁명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가상과 현실의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메타버스 기술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내러티브 경제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를 디지털문화시대, 디지털 스토리텔링이 중심이 되는 시대라고 일컫는다.

▶ 내러티브와 정보의 속성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시대

디지털 스토리텔링 시대는 단순한 기술의 변화가 아닌 패러다임의 변화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 시대 이전, 그러니까 구술문화시대와 인쇄문화시대, 그리고 전기문화시대까지의 내러티브들은 일방향적인 스토리텔링을 특징으로 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독자·관객은 일방적으로 향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자·관객은 제공된 내러티브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작가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내러티브 역시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힘을 빌어 만들어진 수많은 내러티브들은 이제 작가 고유의 작업이라기보다는 작가와 향유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창작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미디어가 바로 게임, 웹콘텐츠, 그리고 메타버스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게임은 기존 이야기 예술과는 달리 개발자가 기본적인 내러티브와 바운더리를 제공하고 향유자, 즉 플레이어가 자신의 선택으로 내러티브를 생성하는 구조를 창조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퀘스트를 수락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전투나 채집 중 어떤 액션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내러티브를 향유하는 경로와 경험의 양, 그리고 질은 모두 달라진다.

게임에 익숙하지 않다면 포털 사이트의 첫 화면을 떠올려볼 수 있다. 모두가 같은 페이지로 시작하지만 어떤 기사 혹은 정보를 선택하고 읽었는지에 따라 향유자마다 모두 저마다의 경로를 만들게 되지 않는가? 그야말로 수백 개, 아니 무한개의 내러티브가 생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용자의 개입이 내러티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변종의 이야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러티브를 만들어가기도 하는 이 특이한 구조를 우리는 쌍방향 스토리텔링이라고 부른다. 일방향 스토리텔링(One-way Storytelling)에서 쌍방향 스토리텔링(Interactive Storytelling)으로의 진화는 디지털 기술의 상호작용성에서 비롯된다. 웹과 게임을 통해서 발현되는 상호작용성은 사실상 오늘날 대다수의 미디어와 내러티브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특징

끝이 없어 보이는 기술의 진화가 놀라운 까닭은 진화의 속도 또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짧은 역사에 비해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혁명과도 같은 새로운 내러티브 기술로 수많은 실험들을 통해 뉴미디어를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질서를 이어오던 문화표현의 핵심이던 내러티브 형식에 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데이터베이스의 콘텐츠화이다. 그동안 인류는 인과성, 선후관계, 순서짓기 등의 내러티브에 익숙했다. 하나의 세계관에 결속된 존재로, 개인의 독자성보다는 집단의 완결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개인과 개인의 관계 – 개인과 집단의 관계 – 집단과 집단의 관계를 중시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는 이 관계의 변화를 모색한다.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새로운 저장 공간에 아카이빙된 수많은 데이터들은 이제 저마다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누구나 자유롭게 데이터를 선택하고 재가공, 재생산할 수 있는 공유재화, 공공재화로서의 가능성 또한 그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 이른바 데이터베이스는 단순한 데이터들의 집합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게 검색과 복구가 가능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들은 누가 어떤 데이터를 선택하고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저마다의 내러티브를 생성할 수 있다. 데이터베이스에서 데이터를 선별하고 선택, 추출, 이미지를 변형하여 제2, 제3의 창작물로 재생산해내는 시대는 창작 주체에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소수의 작가군만이 작품을 생산해내는 시대에서 우리 모두가 창작의 주체가 되는 시대로 말이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저작 도구들이 만들어지자 수많은 콘텐츠들을 창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고, 블로그·SNS·유튜브와 같은 다양한 플랫폼들의 등장은 누구나 자신의 콘텐츠를 유통·홍보·마케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심지어 전자상거래 기술의 도입은 창작자에게 경제적 가치까지 누리게 하는 결과로 연결되었다.

▶ 패러다임으로 바라본 스토리텔링의 진화 3단계

“현실의 공간을 확장한다는 개념으로 메타버스를 이해하고 활용할 때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공간은 그만큼 더욱 넓어질 것이다.”

리얼 액티비티 스토리텔링 시대

여기에 네트워크 기술과 실감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다수의 사용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리얼 액티비티 스토리텔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스크린들은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고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컴퓨터로 보다가 모바일로 다시 볼 때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하는지를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떠올려보면 Nscreen 시대의 연결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다.

컴퓨터 너머의 세계로서 현실세계와는 분리된 허구 세계로 인식되었던 가상세계는 이제 현실의 경제와 사회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확장된 세계, 즉 메타버스로 진화 중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메타버스는 인터넷의 미래라는 관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현실세계의 모든 것들은 이제 가상세계로 옮겨지고 있다. 도서관도 박물관도 2D와 3D 그래픽 기술을 활용하여 가상공간에 지어지고 있고, 우리는 매일 이 공간을 방문하여 정보를 찾고 친구를 만나고 놀 것들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세계의 것들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공간을 확장한다는 개념으로 메타버스를 이해하고 활용할 때 우리가 활동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공간은 그만큼 더욱 넓어질 것이다. 현실에서 추구하는 경험과는 다른 상호작용적 경험을 가상공간에서 이어갈 수 있을 때 진정한 메타버스의 스토리텔링이 완성될 것이다.이질적인 매체, 집단, 장르, 세대가 광범위하게 융합하는 컨버전스 문화를 지향하며,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의 세계로 진화 중인 메타버스는 스토리텔링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3번째 단계인 리얼 액티비티 스토리텔링(Real Activity Storytelling)의 단계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단계의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 바로 향유자들이라는 것이다.

메타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데이터들을 어떻게 조합하여 저마다의 독창적인 내러티브를 만들어갈 것인지를 고려하지 않는 메타버스는 결국 무의미한 가상공간으로 남을 뿐이다. 공간을 탐색할 수 있는 데이터를 곳곳에 심어놓는 스토리텔링 기술, 공간 탐색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연결성과 자유도를 구현하는 스토리텔링 기술, 그리고 선택되지 않은 것을 다시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무한 경험의 스토리텔링 기술들을 메타버스에 적용할 때 의미있는 세계로서의 메타버스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질 것이다.

▶ 디지털 스토리텔링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

진화하는 내러티브 시대를 열 열쇠

스토리텔링의 근저는 분명 내러티브, 즉 이야기를 만들고 이해하고 비평하는 것이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변화로 바라보는 스토리텔링의 진화를 염두한다면 다음 세대가 원하는 스토리텔링은 글이 아닌 이미지로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고, 더 나아가 기술을 활용하여 내러티브를 전달하고 감성을 두드릴 수 있는 공학적이고 디자인적인 능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현실 공간의 확장으로 가상공간을 이해하고, 공간을 경험하고 구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진화하는 내러티브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업과 브랜드는 가상과 현실이 융합되는 새로운 디지털 공간, 메타버스에서 펼쳐질 감각적 체험을 유도하는 새로운 내러티브 전략들을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실험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진화하는 내러티브 시대, 디지털 스토리텔링의 시대와 손잡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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