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자. 한겨레 토요판부에서 문화와 경제 이슈를 중심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있다. <경영의 신>, <글쓰기 고민을 해결해 드립니다>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가상인간 아이돌 그룹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 ‘버튜버 보이 그룹’이 공중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한 영상이 유튜브에서 250만 번 이상 재생되는가 하면, 팬카페에는 2만 명이 몰렸다. 주목받고 있는 가상 아이돌의 성과 및 그 인기 비결을 알아본다.
‘버추얼 휴먼, 버추얼 인플루언서, 메타 휴먼, 사이버 휴먼, 버튜버….’ 가상인간을 이렇게 다양하게 표현한다.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다. 도대체 가상인간은 무엇일까?
가상인간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화하고 발전하고 있다. 먼저 3D로 만들어진 가상인간이다. 원조는 1998년 1월 세상에 나온 국내 1호 사이버 가수 ‘아담’이다. 1집 앨범을 20만 장이나 팔며 인기를 끌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20여 년 전이었으니, 인간답지 못했다(사람과 닮지 않았다). 아담은 그렇게 잊혀 갔다.
최근 3D 형태의 가상인간은 모공과 속눈썹까지 사람과 닮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가상인간과 진짜 사람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 과학 기술 발전을 등에 업고 다양한 형태의 가상인간이 나오고 있다.
먼저 버추얼 아이돌이다. 올해 1월 음악 프로그램 ‘쇼!음악중심’엔 4인조 가상 걸그룹 ‘메이브’가 나와 데뷔무대를 펼쳤다. 이들은 첫 싱글 ‘판도라’를 불렀다. 이 노래는 ‘메이브’ 공식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2,500만 회를 넘어섰다.
그룹 ‘슈퍼카인드’는 버추얼 아이돌 두 명(세진·승)을 포함한 7인조 보이그룹으로, 지난해 6월 데뷔했다. 버추얼 아이돌 세진은 팀에서 센터와 메인보컬까지 맡고 있다. 가상 아이돌은 실제 멤버와 함께 칼군무를 소화한다. 2021년 데뷔한 11인조 가상 걸그룹 ‘이터니티’는 지금까지 싱글 4곡을 선보이며 활동하고 있다.
3D 가상인간은 주로 딥페이크 기술로 제작된다. AI(인공지능)가 수많은 얼굴을 학습한 뒤 가상인간에 맞춰 얼굴을 합성해주는 방식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이머진리서치 자료를 보면, 3D 가상인간 시장은 2020년 100억 달러(약 13조 원) 규모였지만 2030년엔 5,276억 달러(약 707조 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또 다른 흐름은 2D다. 사람과 닮지는 않았지만, 캐릭터를 강조한다. 우리가 흔히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형식이다. 2D는 3D에 견줘 진입장벽이 낮은 편이다. 3D의 경우 저작권, 모션 캡처 등 여러 기술과 장비가 필요한 만큼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2D 방식으로 등장한 가상인간은 2021년 12월 데뷔한 6인조 버추얼 걸그룹 ‘이세계아이돌’이다. 줄여서 ‘이세돌’로 불린다. 이들은 지난 6월 ‘락다운(LOCKDOWN)’에 이어 7월 ‘어나더 월드(Another World)’로 멜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앞서 여기에 이름을 올린 BTS, 뉴진스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이세돌’ 같은 2D 아이돌은 버추얼 유튜버로도 불린다. 버추얼(Virtual)과 유튜버를 합친 말로, 줄여서 버튜버로 통한다. 버튜버는 아바타로 유튜브나 인터넷방송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실제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가상의 아바타를 내세워 시청자와 소통하는 게 특징이다.
2016년 12월 일본 버튜버 ‘키즈나 아이’가 자기소개 때 이 단어를 쓴 게 시작이다. 일본에선 ‘홀로라이브’ ‘니지산지’ 등 여러 버튜버가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선 ‘플레이브’ ‘레볼루션 하트’ ‘스타데이즈’ 등이 활동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마켓워치 자료를 보면, 2022년 세계 버튜버 시장 규모는 2조 8,000억 원에 이르렀다. 마켓워치는 이 시장이 2030년 17조 원으로 6배 가까이 불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딥스튜디오
이처럼 가상인간이 속속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상인간은 실제 아이돌 가수나 진짜 연예인과 달리 가창력 · 춤 실력 · 인성 · 학교폭력 · 성 추문 · 병역 · 결혼 등의 문제에 휘말릴 여지가 없는 점이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IT 기업들을 중심으로 가상인간을 속속 만들고 있다.
MZ세대가 가상인간에 거부감이 덜한 점도,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MZ세대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거나 만화 캐릭터 사진을 걸어놓고 방송하는 BJ나 스트리머와 자연스레 교감을 만들어 나갔다. MZ세대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이런 소통을 더 자연스러워하는 경우가 많기에, 가상인간 역시 자연스럽게 인기를 끌고 있다.
경제문제 등 사회적인 현상도 가상인간 인기를 거들고 있다. 취업난과 집값 폭등으로 젊은 세대의 꿈과 희망이 점점 줄어들면서, 이런 현실을 벗어나 가상세계에서 대리만족하고 싶어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젊은 세대들이 현실과 다른 ‘부캐’로 살아가는 걸 재미있어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게임학회장인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른바 386세대와 X세대는 현실과 가상의 자아가 분리되는 것을 낯설어하지만, MZ세대는 캐릭터가 자신과 똑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며 “제2의 자아를 만들고 즐기려는 MZ세대의 이런 성향과 맞물려 가상인간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짚었다.
11인조 가상 걸그룹 ‘이터니티’ ©펄스타인
그렇다면 전망은 어떨까? K팝 전례는 가상인간 아이돌에게 가이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K팝은 유튜브·인스타그램·트위터 등 SNS 플랫폼과 호흡하며 전 세계 팬을 확보해 나갔다. 마찬가지로 가상인간은 SNS를 통해 자연스럽게 활동 범위를 넓혀나갈 수 있다.
가상세계에서는 게임, 광고 등 여러 콘텐츠와 시너지를 만들고, 이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개척할 수 있다. 그동안 K팝은 아이돌 콘텐츠를 소설·웹툰·영화 등으로 넓히며 지식재산권(IP)을 다져왔는데, 가상인간 역시 확장판이 될 수 있다.
김상균 강원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K팝 가수들은 소셜미디어에서 콘텐츠를 다각화해 왔다. 노래를 댄스나 게임으로 변형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가상인간도 소셜미디어를 팬들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K팝 아이돌은 신화나 허구적인 세계관으로 새로운 인격을 부여받기도 했다. 실제 인물이 가상의 세계관을 대변한 셈이다. 가상인간도 케이팝 아이돌이 구현하는 세계관처럼 한계를 갖지 않고 무궁무진하게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세돌’을 주인공으로 한 웹툰 ‘마법소녀 이세계아이돌’은 지난 6월 공개한 지 1시간 만에 카카오페이지에서 조회수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관건은 팬덤이다. 가상인간의 성패는 탄탄한 팬덤을 쌓아갈 수 있느냐에 달렸다. 팬덤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아무리 ‘사람 같은’ 가상인간이라도 거리감은 좁혀지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기술보다 팬덤에 집중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가상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소녀 리버스’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나오는 가상 아이돌은 이미지가 2D 애니메이션 수준에 그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나온 가상 아이돌은 연애썰 등 거침없는 입담으로 인간미를 드러내며 팬덤을 쌓았다.
단지 새롭거나 신기한 것으로만 그치면 인기 역시 그친다.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오래갈 수 있다. 가상세계에서 팬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 캐릭터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과 개성이 있어야 한다.
최근 가상 밴드를 선보인 김형석 프로듀서는 “가상 밴드여서 ‘재미있다’ ‘신기하다’로 끝나서는 안 된다. 매력을 느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재미와 감동을 주는 포인트를 찾아야 한다. 인간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가상인간이 현실의 아이돌이나 인플루언서, 인기 유튜버로 거듭나기 위해선 팬을 사로잡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줘야 지속가능할 수 있다.
4인조 가상 걸그룹 ‘메이브’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
이세돌 ©왁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