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경제산업부 기자. 2018년부터 K리그를 담당하는 스포츠부 기자로 활약했으며, 현재는 경제산업부 기자로서 스포츠 마케팅을 다루기도 했다. 저서로는 <K리그를 읽는 시간>1·2,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1·2가 있다.
프로스포츠팬들은 이제 경기 관람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경기를 분석하고 프로스포츠 관련 콘텐츠를 재생산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프로스포츠를 향유하고자 한다. 이렇게 팬들의 요구 범위가 늘어난 만큼 프로스포츠 구단들도 다양한 마케팅으로 소통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굿즈와 마스코트 마케팅도 그중 한 가지. 과거의 굿즈가 경기를 응원할 때 사용했던 풍선과 수건, 모자와 유니폼이 전부였다면 지금은 알루미늄 빨대부터 칫솔, 소주잔, 냄비장갑까지….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 번져가고 있다. 마스코트도 대중에 더욱 다가설 수 있는 콘텐츠로 업그레이드하며 공감과 관심을 사고 있다. 친밀하고 ‘신박한’ 디자인으로 프로스포츠팬들과 소통하는 굿즈와 마스코트를 살펴본다.
대기업들이 주축이 돼 사회공헌하듯 운영한 20세기 국내 프로스포츠 구단들은 ‘굳이’ 수익 창출, 소비자 만족, 사회공헌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국민들의 즐길 거리가 제한적인 데다, 매스미디어와 손잡고 꾸준히 송출하니 스타 선수들이 경기만 잘하면 관중들이 알아서 경기장에 찾아왔다.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면 유니폼과 모자 등 선물꾸러미를 안겨주던 게 그나마 적극적으로 벌인 스포츠마케팅이었다.
21세기 들어 미디어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국민들의 즐길 거리가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프로스포츠 구단들도 저마다 충성고객 유지는 물론 새로운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 가운데 하나가 디자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구단의 상품이라면 고민 없이 샀던 충성 팬들도 쓸모와 디자인을 꼼꼼히 따져 구매하고, 신규 팬들은 일상에서의 활용도까지 고민한다.
프로스포츠 구단들의 인식도 점점 변해갔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나 유럽 프로축구리그 명문 구단들을 벤치마킹하며 다양한 굿즈를 내놓거나,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아이템에 공을 들였다. 한 번 탄생하면 좀처럼 바뀌지 않았던 마스코트들도 굿즈는 물론 영상 등 시각물 제작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하거나, 과감히 새 마스코트로 교체했다. 이젠 디자인을 통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는 노력도 곳곳에서 시작된다.
‘스포츠의 천국’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굿즈는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진다는 말에 무리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류현진이 뛰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온라인 스토어만 털어봐도, 유아용품(baby) 카테고리엔 턱받이부터 잠옷, 의자, 소프트볼까지 60가지가 넘는 상품이 팔리고 있고 여성(lady) 카테고리는 원피스와 민소매 티셔츠, 머리띠, 시계, 팔찌, 목걸이, 귀걸이, 신발, 레깅스 등 70가지 이상이 팔리고 있다. 거구의 팬들을 위한 ‘빅사이즈’ 굿즈도 70가지가 넘는다. 이들의 다양한 상품 개발의 원천은 사무국 차원의 통합마케팅이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부담된다면, 상품은 획일화하되 구단별 디자인을 개발해 동일한 제품을 찍어내는 방법을 고려해볼 만하다.
손흥민이 뛰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의 상품은 모든 일상을 커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상품 카테고리만 해도 일일이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여성용, 남성용, 아이용, 아기용, 가정용품 선물은 물론, 갖가지 골프용품도 팔며 종목의 선을 넘는 판매 전략을 펼치기도 한다. 드라이버 및 퍼터 커버부터, 볼 마커, 골프장갑, 골프공, 나무 티 등 웬만한 골프 장비를 토트넘 상품으로 갖춰 갈 수 있다. 그 상품들은 침대 및 베갯잇, 쿠션, 스탠드조명, 칫솔, 벽면 스티커, 커튼, 옷걸이, 빨래바구니, 칫솔, 핸드워시, 게임의자에 이르러 웬만한 인테리어는 모두 토트넘 제품으로 장식이 가능한 데다 반려견 옷부터 목줄, 장난감, 이름표까지 온 식구가 집안 모든 곳에서 토트넘을 만날 수 있다. 개인 맞춤형 ‘스퍼스 와인’이나, ‘홋스퍼 진’ 같은 술도 판다. 크리스털 팰리스의 ‘크리스털 와인’처럼 구장별로 특색 있는 먹거리도 즐비하다.
한국에서도 이 같은 시도들은 이어진다. 프로축구팀은 최소 3가지 이상의 유니폼은 물론 각종 트레이닝복과 롱패딩, 이너웨어, 주장 완장까지 선수들이 착용하는 모든 걸 판다. 프로야구에선 최근 삼성과 롯데가 광작가, 김정기 작가와 손잡고 의류를 만드는 것처럼, 수시로 ‘스페셜 에디션’을 내놓으며 팬들의 지갑을 연다. 다만 토트넘의 술 판매와 같은 사례처럼 먹고 마실 거리에 대한 아쉬움은 많다. 종목을 막론하고, 프로야구 SSG랜더스나 삼성 라이온즈, 프로축구 인천 유나이티드나 포항 스틸러스처럼 구장 운영을 구단이 직접 하는 구단들 외엔 대부분 지방자치단체 산하 공단이나 재단이 구장을 운영하면서 구단 자체적인 먹거리 개발이 어려운 실정이다.
마스코트나 캐릭터 활용도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일단 구단의 마스코트를 활용해 활발히 상품을 개발하는 게 기본적인 추세지만, ‘캐릭터 강국’ 일본의 경우 우리 국민들에게도 친숙한 도라에몽이나 리락쿠마, 스누피, 헬로키티 등 다양한 캐릭터 인형에 일본 국가대표나 프로구단 유니폼을 입혀 판다. 캐릭터는 그대로 두되, 새로 출시되는 유니폼을 입혀 팔 경우 팬들은 캐릭터 인형을 차곡차곡 전시하면서 대표팀이나 구단의 유니폼 변천사를 기록해 둘 수 있다. 한국도 뽀로로나 펭수, 카카오프렌즈, 라인프렌즈에 구단 유니폼을 입히지 말란 법 없다. 이제 시작하더라도, 옛 유니폼 입힌 인형을 한정판으로 팔면 된다.
국내 구단들의 비슷한 시도들도 있다. 마블 시리즈, 헬로키티 등 기존 캐릭터와 콜라보레이션 상품들을 꾸준히 내놓은 프로야구 LG 트윈스는 무관중 경기가 다수인 올해 ‘잔망루피’를 담은 유니폼과 인형, 텀블러, 휴대폰 케이스, 무선이어폰 케이스 등을 내놨다. 지속 가능성과 스토리의 연속성을 가져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구단들의 굿즈 판매 전략 변화는 ‘경기장 소비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 20~30대, 이 가운데서도 여성 관중 비중의 증가와 궤를 같이한다. 남성 관람객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2000년대 이전과는 달리 디자인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20~30대 여성과 어린이 관람객의 비중이 늘어나기 시작하며 이들을 겨냥한 참신한 상품들을 꾸준히 늘려왔다. 특히 일상에서의 활용도를 높인 상품들이 꾸준히 늘어나는 확장성이 눈에 띈다.
최근 수년 사이 프로축구 K리그를 중심으로 한 프로스포츠 구단들이 마스코트 리뉴얼을 감행했다. 지난해까지 K리그 4연패를 했던 전북 현대는 2021 시즌을 앞두고 새 캐릭터 ‘나이티’와 ‘써치’를 발표했다. 2013년 탄생한 마스코트 초아와 초니를 대신할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캐릭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이티와 써치는 2021 시즌 개막전부터 선수들을 에스코트하고, 관중들 앞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함께 호흡했다. 구단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영상에서도 이들은 시즌 초반부터 동분서주했다.
30년을 훌쩍 넘긴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를 비롯해 각 프로 종목의 역사가 수십 년씩 쌓이면서 생겨나는 ‘추억팔이’도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 이른바 ‘레트로 유니폼’으로 불리는 옛 디자인 유니폼이 대표적이다. 프로스포츠 열기가 뜨거웠던 1990년대에 사랑받은 유니폼 디자인을 다시 꺼내면서, 팬들의 추억을 자극하고 구단의 자긍심을 일깨운다.
선구자는 2006년부터 ‘챔피언의 추억’을 팔기 시작했던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다. ‘챔피언스데이’를 지정하고, 선수단이 1984년과 1992년 우승 당시 유니폼을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고, 때맞춰 팬들에게도 레트로 유니폼을 판매한다. 반응이 워낙 좋다 보니 롯데 구단은 자체 쇼핑몰을 통해 흰색 바탕의 홈 유니폼과 푸른색 바탕의 원정 유니폼을 상시 판매하고, 이를 활용한 굿즈들도 내놓는다.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 두산 베어스 역시 1982년 당시의 감격을 되새기며 OB 베어스 시절의 올드 유니폼과 모자를 선보여 팬들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한때 강호였던 한화 이글스도 1986년 창단 때부터 1993년까지 8년간 입었던 줄무늬 유니폼을 2012년 내왔다. 올해 창단한 SSG랜더스도 공식 유니폼 발표에 앞서 SK 와이번스가 착용했던 ‘인천군(仁川軍)’ 유니폼을 착용하면서 연고지에 순탄히 ‘착륙’했다. 이 유니폼은 1947년 4대 도시 대항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인천야구 대표팀 유니폼을 재현한 것이다.
프로축구에선 지난 2015년 수원 삼성 창단 2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푸른 날개’ 레트로 유니폼이 히트작으로 꼽힌다. 수원의 창단 연도인 1995년에서 착안해 1995벌(홈 유니폼 1,500벌, 원정 유니폼 495벌) 한정 제작한 이 유니폼은 1차 판매 시작 3분 만에 준비된 500벌이 모두 팔렸고, 추가로 내놓은 543벌도 10분도 안 돼 품절됐다. 일부 팬은 판매일 전날부터 수원월드컵경기장 앞에 텐트를 치고 대기했을 정도였다. 검정색과 빨강색 가로줄무늬 유니폼을 입어 온 포항 스틸러스도 1996년 후기리그부터 2000년까지 사용했던 ‘시안블루(Cyan Blue)’ 컬러를 활용한 복고 유니폼을 2017년부터 출시해 큰 호응을 얻었다.
스포츠디자인은 때론 스포츠산업 영역을 넘어 사회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메신저 역할도 해낸다. 지난 5월, 수원 삼성과 제주 유나이티드의 K리그 경기에서 선보인 ‘생명나눔 유니폼’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장기기증 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였다. 두 팀 선수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감소한 장기기증 희망 등록자 수를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자신의 유니폼 가슴에 상대 팀 유니폼을 심장 모양으로 재단해 부착한 후 경기를 펼쳤다. 양 팀 유니폼 하단에는 장기 이식 대기자 수를 나타내는 숫자 42,281을 새겼다.
슬로건 디자인으로 연고지의 아픔을 달랜 경우도 있다. 프로배구 OK금융그룹은 2014년 시즌 개막 전 유니폼에 광고를 모두 빼고 ‘위 안산(We Ansan!)’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뛰었는데, 앞의 두 음절인 ‘We An’을 붉은 글씨로 강조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슬픔에 잠긴 연고지 안산시민들을 향한 메시지였다. 진심이 통했을까.
2014~15년 시즌 홈 구장인 안산상록수체육관엔 구름 관중이 몰렸고, 팀은 승승장구했다. 시즌 막판인 2015년 2월, 구단은 ‘기적을 일으키자’는 슬로건을 새로 내걸었다. 프로 2년차에 우승이란 기적을 일구자는 의지와 함께, 세월호 침몰 후 발견되지 않은 남은 실종자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까지 담은 메시지였다고 한다. 시민에 한발 다가선 OK금융그룹은 결국 홈 팬들의 뜨거운 지지 속에 창단 2년차 우승이란 기적을 일구며 연고지 팬들에게 위안이 됐고, 지금까지도 안산 시민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친환경 굿즈 판매도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국내 사례 가운덴 프로야구 SSG 홈구장인 랜더스필드에서만 한정 판매된 ‘레드 리유저블 컵 세트’나 팬들이 직접 경기장에 모은 페트병으로 유니폼을 만드는 제주 유나이티드의 기획 등 국내에서도 사회적 의미를 담은 시도들은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