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매일신문 <정덕현의 엔터인사이드>, 이데일리 <정덕현의 끄덕끄덕> 등 칼럼을 연재하며, 미디어와 문화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를 썼다.
최근 콘텐츠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건 ‘진심’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를 구분해낼 정도로 예민해진 영상 감수성을 가진 대중들은 진심이 담긴 콘텐츠들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너무 진심이어서 응원하고픈 콘텐츠들이 최근 주목받는 이유다.
지금 예능의 주류 트렌드는 단연 ‘관찰카메라’다. 관찰카메라는 혼자 사는 삶을 들여다보기도 하고(<나혼자산다>), 부부들의 사랑과 갈등을 담아내기도 하며(<동상이몽>), 나아가 불황에 코로나19까지 겹쳐 힘겨운 음식점들을 관찰하고 솔루션을 제공하기도 한다(<백종원의 골목식당>). 또 연애하는 청춘남녀들의 내밀한 감정을 들여다보기도 하고(<하트시그널>), 나아가 최근에는 헤어진 커플이나(<환승연애>), 이혼한 부부의 삶(<우리 이혼했어요>)은 물론이고, 이혼 후 홀로 육아를 하며 살아가는 싱글맘들의 삶(<내가 키운다>) 같은 다양한 삶의 양태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관찰카메라가 예능 트렌드가 된 건, 영상에 대한 대중들의 감수성이 훨씬 더 예민해졌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고 편집하고 올리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이제 대중들은 어떤 영상이 진짜이고 어떤 영상이 가짜인가를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래서 진짜가 아닌 연출 영상을 찾아내기도 하고 때론 ‘조작 방송’의 증거가 등장해 논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반대로 관찰카메라에 무심히 찍힌 어떤 진짜 모습과 그로 인해 드러난 진정성 때문에 열광하게 되는 상황도 생겨난다.
예를 들어 JTBC <내가 키운다> 같은 프로그램은 싱글맘들의 육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그 기쁨과 어려움을 공감하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무언가 재미요소를 집어넣기 위해 의도하거나 하는 그런 조미료 없이도 다루려는 소재 자체에 집중한 것이 오히려 싱글맘 육아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채널A <도시어부> 같은 낚시를 소재로 하는 관찰카메라가 시즌3까지 순항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출연자들의 진정성 덕분이었다. 무려 40시간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밤샘낚시를 하거나, 바다 한가운데서 배에 거의 갇히다시피 한 채 밤새도록 낚시를 하는 이 프로그램은, 진짜 낚시에 진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노동강도를 보여준다. 따라서 시청자들도 낚시에 진심인 ‘찐팬’들이 대부분이다. 게스트가 나와 괜스레 예능식의 토크를 할라치면, “낚시나 하라”고 말할 정도다. 관찰카메라 시대에 진정성이 핵심적인 성패의 코드가 됐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내가 키운다 ©JTBC
내가 키운다 ©JTBC
내가 키운다 ©JTBC
진정성을 요구하는 시청자들의 목소리로 인해, 최근 스포츠가 콘텐츠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물론 스포츠 소재 콘텐츠들은 KBS <날아라 슛돌이(2005)>, <천하무적 야구단(2009)>, <우리동네 예체능(2013)>, <청춘FC(2015)> 등등 예능의 단골소재였다. 하지만 이들 스포츠 예능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스포츠 자체가 ‘각본 없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예능적 요소들을 많이 집어넣는 스포츠 예능은 오히려 스포츠보다 재미없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2019년 JTBC <뭉쳐야 찬다>가 스포츠 레전드로 불리는 스타들을 모두 끌어모아 ‘조기축구’로 시작해 차츰 축구 경기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면서 시청자들은 단지 예능이 아닌 스포츠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KBS <씨름의 희열>은 대중적 인기가 식은 씨름을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형식과 연출로 담아내, 제목 그대로 씨름이라는 스포츠가 주는 맛의 희열을 전해주었다. SBS <핸섬 타이거즈>는 서장훈을 감독으로 세워 ‘진짜 농구’의 묘미를 선사했고, 이후 KBS <축구 야구 말구>, JTBC <뭉쳐야 쏜다>, SBS <골 때리는 그녀들> 같은 스포츠 예능이 트렌드로 떠올랐다. 예능프로그램들이 예능이 아닌 스포츠 자체에 집중하면서 생겨난 변화였다.
<골 때리는 그녀들>은 개그맨부터 모델, 배우 등등의 연예인들이 팀을 꾸려 여자축구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스포츠라는 소재 자체가 갖는 묘미에 출연자들의 진심이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발톱이 빠져가면서까지 축구의 묘미에 빠져드는 연예인들의 땀과 눈물은 시청자들 또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처럼 진심을 가진 출연자들이 참여하는 스포츠 예능의 트렌드는 최근 ‘골프 예능’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골프에 진심인 이경규, 이승엽이 출연하는 SBS <편먹고 공치리>나 박세리가 나선 JTBC <세리머니 클럽>, 배우들 중 베테랑 골퍼로 잘 알려진 이순재, 박근형, 백일섭, 임하룡이 출연하는 MBN <그랜파> 같은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골 때리는 그녀들 ©SBS
그랜파 ©MBN
세리머니 클럽 ©JTBC
이처럼 진정성이 중요해진 사정은 드라마 같은 콘텐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는 SBS <라켓소년단>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건, 이 드라마가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 종목에 보여주는 진심어린 응원이 느껴져서다. 올림픽 같은 국가적인 스포츠 이벤트 때 잠시 주목받았다가 금세 잊히곤 하는 배드민턴에 뛰어든 소년소녀들의 진심어린 성장기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축구나 야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비인기종목으로 취급받는 배드민턴의 처지를, 땅끝마을 변방 시골사람들의 처지와 연결해 오히려 그 위치여서 더 매력적이고 훈훈한 이야기들로 풀어낸 드라마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응원의 마음’을 갖게 만든다.
이처럼 조명 받지 못하고 심지어 힘이 없어 핍박받는 약자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지지와 응원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드라마들 역시 최근 부쩍 늘고 있다. SBS <날아라 개천용>처럼 실제 재심 전문 변호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억울한 누명을 쓴 사법 피해자들을 돕는 드라마는 물론이고, <모범택시>나 tvN <악마판사>처럼 실제 현실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모티브로 가져와 가상의 판타지 설정으로 약자들을 위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드라마, 또 tvN <빈센조>처럼 약자들을 위한 다크히어로가 등장하는 드라마들은 모두 시청자들의 지지와 응원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 건, ‘사법 정의’에 대한 대중들의 갈증이 커졌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아 생겨난 드라마의 판타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권력자들과 대결하는 약자들을 ‘우리 편’으로 상정하고 응원하게 만드는 드라마들은 마치 치고받는 스포츠 같은 묘미를 선사한다.
최근 성공적인 미디어 콘텐츠들에 투영된 대중들의 정서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진짜’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진심에 ‘응원’하고픈 마음을 갖게 만드는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경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즉 진짜(진심)이기 때문에 그 간절한 마음에 시청자들도 응원하고 지지하고픈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스포츠가 가진 성격들과 상당부분 맞닿아 있다. 진짜 실감과 감동을 얻고픈 대중들의 욕망이 스포츠를 아예 소재로 끌고 오거나, 혹은 스포츠를 보는 듯한 응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콘텐츠에 더 열광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한 룰과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성과, 지더라도 노력의 과정은 헛되지 않았다는 위로 등등… 스포츠가 가진 ‘각본 없는 드라마’가 이제 미디어 콘텐츠들 속으로 들어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라켓소년단 ©SBS
날아라 개천용 ©SBS
모범택시 ©SBS
빈센조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