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역주행에 열광할까

글. 김교석

TV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며 푸른숲 편집장. 전 ‘필름2.0’ 기자이며 <아무튼, 계속>, <오늘도 계속 삽니다>를 썼다. 온라인 미디어인 ‘엔터미디어’에서 ‘어쩌다 네가’라는 칼럼명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해 글을 쓴다.

2021년 상반기 트렌드는 ‘역주행’으로 꼽을 수 있다. 역주행은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음원, 콘텐츠 등이 갑작스레 순위를 거슬러 올라가 상위권에 안착하거나 히트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체를 고민할 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아이돌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단숨에 큰 인기를 모으거나 모두의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명곡이 또 한 번 음원 차트에 오르내리는 현상은 어떻게 시작되고 역주행에 반응하는 심리는 무엇에서 기인하는 걸까?

올해의 아이돌은 단연코 ‘브레이브걸스’

지난 2년간 BTS가 이룬 성과는 K-pop의 범주를 넘어섰다. 지난해 가을 발표한 첫 영어 곡 ‘다이나마이트’로 차트인과 동시에 1위를 달성하는 핫샷 데뷔를 한 이후 연이어 ‘Savage Love’ 리믹스, 한국어 곡 ‘Life Goes On’으로 각각 1위에 올랐다. 그리고 지난 5월 말 ‘버터’를 발매한 뒤 빌보드 차트 6주 연속(7월 둘째 주 기준) 1위를 기록했다. 이들이 제친 경쟁 상대는 카디비, 드레이크, 두아 리파 등이며, 밥 말리, 밥 딜런, 메탈리카, 너바나,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단 한 번도 못했던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BTS는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려 4차례나 차지했다. BTS는 이제 K-pop의 상징을 넘어서 전 세계에 자신들의 세계관을 구축한 메인스트림 중의 메인스트림이다.

BTS가 전 세계를 무대로 유례없는 성공신화를 쓰고 있지만 K-pop의 본진인 한국에서만큼은 올해의 아이돌 자리에 앉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반기가 남긴 했다만, 그 누가 나오든 이미 2021년의 아이돌의 자리는 확정됐기 때문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올해의 아이돌이자 이슈의 중심, 최근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쓴 주인공은 바로 해체를 앞두고 ‘롤린’한 30대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다.

차트를 거스르는 드라마틱 스토리

모든 대중문화는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콘텐츠란 결국 어떤 장르나 속성이든 기본 분자는 스토리다. 스포츠가 사랑받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승부 예측은 확률의 영역이지만 승부의 결과는 그럼에도 끝까지 붙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를 만들기까지 드라마틱한 과정이 돋보이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언더독 팀의 승리는 짜릿함을 넘어 감동으로 다가오고, 이런 스토리들이 특정 선수와 팀의 팬이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에서 시작된 브레이브걸스 역주행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 또한 바로 이 서사에 있다. 브레이브걸스가 2017년에 발매한 ‘롤린’이 올해 초, 갑자기 큰 인기를 얻으며 음원사이트는 물론이고 각종 음악방송들에서 1위를 차지했다. 곡도 좋고 멤버들도 매력적임에도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열광적 지지와 애정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 이유는 5년 여간 무명의 시간을 버텨오면서 쌓은 진정성이 폭발하는 무대를 이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관련 영상 댓글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표현이 ‘찐 행복’이다. 브레이브걸스는 대부분의 군부대가 지방과 오지에 있음에도 부름을 받으면 기꺼이 달려갔다. 무대에 설 수 있어서 찐으로 행복한 아티스트와 멋지고 신나는 공연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서 찐으로 행복한 객석의 리액션이 만들어내는 열기에 빠져들었다.

당시 군 생활을 했던 예비역들이 갖는 애틋함과 연대 또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스토리다. ‘롤린’을 들으며 군 생활에 정서적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예비역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고, 추억 소환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감사함을 보답하고자 뭉쳤다. 10여 명밖에 없어 ‘십장로’라 불리던 팬클럽 규모는 순식간에 몇 개 사단에 이를 정도로 조직화됐다. 그리고 역주행은 롤린에서 끝나지 않고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으로 이어졌다. 무명에서 드디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현실판 동화는 지난 6월 17일에 발표한 브레이브걸스의 다섯 번째 미니앨범 ‘서머 퀸’으로 정점을 찍었다. 앨범 초동 판매(발매 후 일주일간 판매량) 6만 장을 돌파했으며(블랙핑크, 트와이스 바로 아래 급이다) 발매 직후 각종 TV 음악 프로그램 1위를 독차지했다. 역주행으로 시작된 동화의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MZ세대가 이끄는 새로운 문화

이쯤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동화를 써 내려간 작가의 정체다. 발견하고 띄워주고, 스토리의 완결을 지어준 것은 기성 미디어가 아니라 대중이었다. 각각의 개인들이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소통으로 역주행에 가속을 붙였다. 브레이브걸스 역주행은 1020세대 위주인 기존 아이돌 팬덤 시장에서 3040세대들이 힘을 발휘한 사건이기도 했다. 꿈과 현실의 괴리, 녹록지 않은 인생의 무게를 알아가기 시작한 이들에게 인고의 세월을 뒤로하고 하루아침에 인생이 뒤바뀌는 역주행의 서사는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티스트와 제작자들도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대중을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브레이브걸스가 광고주에게 제시하는 유일한 조건이 ‘군인들에게 대우를 잘 해주는 기업일 것’이다.

SBS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의 히트상품 ‘컴눈명’은 아예 시청자 아이디어로 시작된 기획이다. ‘컴백해도 눈 감아 줄 명곡’의 줄임말로, 과거 전성기를 보낸 아이돌그룹의 무대를 재소환해 K-pop 황금기를 돌아보는 콘셉트다. 지난 3월 준호가 마지막으로 전역하면서 5년여의 긴 공백을 마무리하고 완전체로 컴백한 원조 짐승돌 2PM은 컴눈명 시청자층과 과거 팬층의 싱크가 맞아떨어지며 입소문이 폭발했다. 타이틀곡 뮤직비디오 조회 수는 이틀 만에 1000만뷰를 돌파했고, 댓글 창에서 ‘우리집’ 가사를 개사한 재기발랄한 패러디의 향연은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됐다. 흔한 추억 콘텐츠로 시작했지만 그 시절을 함께 향유했던 팬들이 모이면서 이야기의 판이 커졌다. 결국 SBS는 6월 11일 <문명특급 컴눈명 스페셜>을 편성하고, 컴눈명 콘서트를 열었다. 나인뮤지스, 애프터스쿨, 2PM, 오마이걸 등 2010년대 풍미했던 아이돌의 숨은 명곡을 2021년 TV 무대에 소환했다. 이 방송은 해당 주 비드라마 화제성 2위에 랭크되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역주행, 새로운 기회가 온다

아예 역주행의 스토리텔링을 빌려와 3040세대뿐 아니라 그 아래 세대에게 다가가려는 전략을 내놓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빅마마와 성시경은 딩고뮤직 ‘킬링보이스’와 ODG 등의 유튜브 채널에서 컴백을 알렸다. 9년 만에 원년멤버로 돌아온 빅마마의 ‘킬링 보이스’ 영상은 공개되자마자 유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 1위에 올랐고, 신곡 ‘하루만 더’ 또한 각종 음원사이트 1위를 차지했다. 자발적 발견의 초석을 마련하면, 그 다음은 소비자들이 알아서 SNS나 게시판에 그 시절의 추억이나 스토리를 전하는 입소문으로 확산하는 방식이다. SG워너비의 차트 재진입 또한 비슷한 사례 중 하나다. MBC <놀면 뭐하니> 에서 2000년대 초반 발라드 열풍을 재현하는 MSG 프로젝트에 출연하면서 까마득하게 잊혔던 SG워너비가 10여 년 만에 3040세대에겐 추억을, 그보다 어린 세대에겐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단 일주일 만에 <놀면 뭐하니> 의 관련 유튜브 콘텐츠들은 도합 1,000만 뷰를 돌파했으며, ‘타임리스’를 비롯한 여러 히트곡이 음원사이트 탑10에 재진입하는 등 또 한 편의 역주행 신화를 이뤄냈다.

몇 해 전, 그저 버려야 할 낡은 것, 불편한 것, 예쁘지 않은 것, 고물로 평가받던 옛날 디자인과 물건들이 ‘뉴트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새로운 스타일로 떠올랐다. 세월의 흔적과 영세 공업사들로 빼곡하던 을지로가 젊은이들의 성지로 거듭났고, 현대사에서 자취를 감췄던 다리가 달린 ‘양은 오봉’은 힙스터의 상징으로 귀환했다. 2021년 역주행이 유행을 넘어선 일종의 사회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도 뉴트로의 부상과 비슷한 맥락이다. 특정 세대의 공감대와, 입소문을 내고 소통하는 데 최적화된 플랫폼과, 스스로 발견하는 재미가 만나서 싹 틔운 스토리다.

역주행에 대한 열광적 지지는 기회의 은유이기도 하다. 기꺼이 대열에 동참하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건 우리네 삶과 현실이 그럼에도 살아갈만하다는 긍정적 메시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가 있을 수 있음을, 언제든 역전 홈런을 칠 수 있다는 위안의 스토리텔링이다. 요즘 역주행 코드에서 서사가 더욱 도드라지는 이유이자, 다음 타자가 또 나타나길 기다리는 이유다. 브레이브걸스를 거치며 역주행은 반짝 유행이 아니라 응원의 심리학이자 콘텐츠를 소비하는 풍토를 변화시킨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진화했다.

CONTENTS : CONTENTS ISSUE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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