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교석
TV칼럼니스트, 푸른숲 편집장. <아무튼, 계속>, <오늘도 계속 삽니다>를 썼다. 온라인 미디어인 ‘엔터미디어’에서 ‘어쩌다 네가’라는 칼럼명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해 글을 쓴다.
© 셔터스톡
지난 1년 사이 홍대 앞에는 30여 군데 가까운 가챠숍이 문을 열었다. 홍대 AK플라자는 아예 5층 전체를 가챠 매장 중심의 일본 콘텐츠 특화 존으로 구성했고, 국내 최대 규모의 가챠숍인 ‘가챠 파크’가 있는 아이파크몰 용산점은 최근 가챠랜드, 팝콘D스퀘어 등 가챠 매장 수를 더 늘렸다. 스타필드는 수원점에 가챠숍과 피규어숍들만 모은 ‘펀스퀘어’를, 롯데몰은 대규모 포켓몬 팝업으로 인기를 모은 잠실 롯데월드몰을 시작으로 가챠 매장을 속속 런칭 중이다. 팬시 상품 유통사인 텐바이텐은 서울과 제주도에 관광 특화된 가챠숍을 오픈했고, 편의점 CU도 이 대열에 합류해, 혜화 마로니에공원점과 은평본점에 가챠를 시범 도입한 이후 지점 확대를 모색 중이다.
그런데 왜 뽑기가 ‘가챠’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을까. 가챠는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렸을 때 나는 소리, ‘가챠가챠(ガチャガチャ·철컥철컥)’에서 나온 미국 캡슐토이의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2020년부터 팬데믹 시대 비대면 산업으로 다시 뜨기 시작해 마침 그해 출시된 <귀멸의 칼날> 극장판의 신드롬을 타고 가챠 붐으로 번졌다. 우리의 경우에는 팬데믹 종식 이후 기록적인 ‘엔저’가 야기한 일본여행 열풍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여행지에서 경험한 색다른 즐거움을 일상에서 다시 만나며 격한 반가움으로 이어졌다. 그런 점에서 가챠는 한때 ‘노재팬 운동’이나 K-콘텐츠의 높아진 위상으로 인해 자연스레 우리네 관심에서 밀려났던 일본과 일본 대중문화를 신선하고 편견 없이 바라보는 새로운 시대 변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이파크몰 용산점에 위치한 ‘가챠 파크’ © HDC아이파크몰
가챠의 인기가 한두 해 유행에 머물지 않고 계속되자 일본에서는 2023년부터 그 이유를 분석하는 기사와 조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공통적으로 경험 소비를 즐기는 젊은 세대의 소비 코드를 주목했다. 마케팅 전문가 오노오 가쓰히코는 저서 <가챠가챠의 경제학>을 통해 ‘손잡이를 돌려서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는 행위 자체가 경험 소비’라고 강조한다. 일반적인 판매 방식으로는 사지 않았을 고객들도 손잡이를 돌리는 체험 자체를 즐기며 소비하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있어 온 캡슐토이와 오늘날 가챠의 결정적인 차이를 높은 퀄리티와 가격이라고 단언한다. 메이저 완구 회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상품들이 성인들의 수집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이 수집욕구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바로 희소성을 내세운 한정판 전략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가챠붐을 타고 ‘지금 뽑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의미를 담은 ‘이치고 이치에’(いちごいちえ,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일본캡슐토이협회도 자체 조사 결과를 분석하며 “과거에는 가챠를 충동적으로 즐겼다면, 지금은 수집을 위한 목적 구매 형태로 바뀐 것이 큰 차이점”이라고 짚었다. 랜덤 상품을 기대하는 재미에 그치지 않고 수집의 영역으로 나아가면서 가챠는 개인의 취향을 드러내는 소비로 이어졌다. ‘획득한’ 상품을 가방에 걸거나, 투명 파우치에 넣어 꾸민 ‘가챠 파우치’를 SNS에 공유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소통하는 문화로 나아간 것이다.
가챠는 귀엽고 무해한 것을 추구하는 세대에게 귀여운 행운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미디어비평가 멕켄지 워크는 오늘날 문화산업에 있어 ‘멋지다(cool)’는 표현이 ‘귀엽다(cute)’로 대체되는 중이라고 한다. 귀여움이란 공격성이나 우열이 제거된 개념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는 이를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존재”라는 무해함으로 풀었다. ‘무엇이 나올까?’ 하는 기대와 설렘이란 경험 소비를 즐기고 난 후 얻는 귀엽고, 무해한 존재들은 가챠를 즐기는 만족감을 증폭시킨다. 즉, 가챠는 ‘가성비’, ‘무해함’, ‘랜덤의 묘미’, 그리고 ‘SNS 전시’라는 오늘날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경험 소비의 집합체인 셈이다.
그렇다보니, 고객 충성도가 중요하거나 1030 여성이 타깃인 산업군에서는 가챠를 흥미로운 마케팅 툴(tool)로 주목하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분야는 단연 화장품 업계다.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에이블리는 지난 2월 화장품을 가챠 형태로 판매하는 ‘뷰티 가챠’를 내놓으면서 입점 뷰티 브랜드 거래액이 최대 9배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일본의 향수 유통점 노즈숍(nose shop)은 방대한 향수를 랜덤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샘플 향수를 캡슐에 넣는 가챠로 업계에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MD 매출이 수익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아이돌 업계에서도 이를 지나칠 리가 없다. SM은 지난해 10월 SMTOWN 30주년 콘서트에서 ‘SMTOWN 30주년 앨범’의 타임캡슐 버전의 가챠를 선보이며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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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험 소비 측면에서 가챠는 팬 베이스의 프로스포츠 업계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마케팅 트렌드다. 특정 경기를 기념하는 랜덤 굿즈, 미니 버블헤드 피규어, 레트로 굿즈 등 갖고 싶은 한정판 가챠를 통해 팬들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응원하고 수집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고, 구단 입장에서는 그 경험을 공유하면서 홍보가 된다. 최근 가챠의 나라 일본의 지자체들이 지역 홍보를 위해 지역 특산품이나 명물을 상품화한 가챠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국내 가챠숍의 주 고객층은 1030 세대 여성이지만, 피규어를 수집하는 4050 세대의 관심도 그에 못지않다. 구매력이 큰 이들의 움직임은 대기업에서 가챠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이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속가능성이다. 가챠가 탕후루 같이 남들이 다 하니까 한번 해보는 유행과 다른 점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 콘텐츠가 결합된 소비라는 데 있다. 난립하는 가챠 매장의 성패도 바로 이 콘텐츠의 유무와 수준에 달려 있다. 높은 퀄리티와 오리지널리티는 수집욕을 자극한다. 이것이 앞서 일본에서도 진단했듯 팬데믹 이후 시작된 가챠 열풍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다. 가챠는 이제 단순한 경험 소비를 넘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자신만의 취향을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인 소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