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이며 푸른숲 편집장. 전 ‘필름2.0’ 기자이며 <아무튼, 계속>, <오늘도 계속 삽니다>를 썼다. 온라인 미디어인 ‘엔터미디어’에서 ‘어쩌다 네가’라는 칼럼명으로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문화 현상에 대해 글을 쓴다.
<SNL 코리아 시즌4> 속 코너 ‘선데이90’ 및 영화 <거미집> 등을 통해 일명 ‘서울사투리’가 밈으로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X세대 완벽 재연’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서울사투리를 분석해 본다.
서울사투리라니. ‘서울’과 ‘사투리’ 이 두 단어는 쉽게 붙지 않는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더라도 사투리 설정은 비주류와 소시민적인, 혹은 특정 지역정서를 상징한다. 사투리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들은 대부분 구수하다, 정감어리다, 남자답다, 감정표현에 솔직하다 등의 인간적이거나 날것의 정서를 강조하는 데 집중된다. 대체로 대도시의 세련, 교양과 대비되는 이미지다. 물론, 당연히 표준어는 서울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고시 표준어규정 제1장 제1항이 바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재 서울말로 정함’이다. ‘서울사투리’는 이런 보편적인 인식을 비틀면서 밈(meme)이자 개그코드가 됐다.
사실 그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말을 뜻하는 사투리는 그 어디에나 다 있다. 지역을 지방이라 부르는 우리말과 문화에 밴 인식이 강해서 낯설어 보일 뿐이다. 실제로도 국문학자들이 정의하는 서울·경기 사투리가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챙피해요’ ‘잘 보이는 것 같애’ ‘밥을 먹었다매’ 등과 같은 전설 모음화나 ‘가보려구요’와 같이 ‘고’를 ‘구’로 쓰는 쓰임 등이 특징적인 예다. 그런데 흥미로운 지점은 지금 회자되는 서울사투리는 서울이란 지역성이 아니라 어느 과거의 한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란 점이다.
최근 개봉한 1970년대 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 <거미집>의 김지운 감독은 극중에서 배우 역을 맡은 임수정, 정수정, 오정세 등에게 직접 70년대 서울사투리 시범을 보이며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서울사투리가 방송가에 본격 코미디코드로 등장한 순간들도 시대고증과 관련이 있다. 각각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와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배우 고아성은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JTBC <아는 형님>에서 촬영을 위해 연구한 서울사투리를 개인기로 선보이며 큰 화제를 만들었다.
이처럼 서울사투리는 웃음 소재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시대고증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상 시대성, 거창하게 말하면 시대정신과 연결된다. 특히 서울사투리가 밈으로 급부상한 결정적인 계기는 쿠팡 플레이 <SNL코리아 시즌4>의 코너 ‘선데이90’의 흥행과 관련이 있다.
94년생 배우 김아영과 2000년생 배우 윤가이는 1990년대 뉴스 인터뷰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당시 젊은이들의 옷차림을 똑같이 차려입고 서울사투리를 구사하는 X세대 인물들을 재현해 큰 사랑을 받았다. 소위 MZ세대의 특성을 담으면서 트렌드를 만들었던 이 라이선스 코미디쇼는 주주클럽의 ‘공주병’ 노래가사 그대로, 나다움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던 90년대 X세대 청춘들의 낭만과 자유를 복각해 다시금 큰 성공을 거뒀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영화 <거미집> ©SNL코리아
서울사투리가 콘텐츠로 소비되는 건 웃기고 생경한 말투 때문만이 아니다. 서주경의 ‘당돌한 여자’가 발표된 시대인 만큼, 말투에 밑도 끝도 없는 당찬 자신감이 서려 있다는 게 포인트다. 연극 무대에 선 듯한 과장된 발성과 콧소리, 말끝마다 ‘요’자를 붙이고 올려 쓰는 억양이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짧은 문장으로 하나하나 끊어 말하며 말끝을 절대 흐리지 않는다.
홍진경, 전도연, 최화정, 김희선, 전지현, 김정은의 전성기 시절 모습이 훌륭한 교보재이며, 당대 청순가련의 대명사인 가수 강수지와 하수빈조차 조곤조곤한 인터뷰 가운데 당당함이 느껴진다. <SNL코리아> 이전 시즌들에서 주현영이 묘사한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이며 잘하고 싶지만 이내 유약함을 들키고 마는’ MZ세대의 특성과는 정반대에 있는 청춘들의 스케치다.
“저희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요, 신경 쓰지 않그든요~”라고 일갈하는 X세대의 태도는 기존의 모든 관습에 전복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일정 정도 불안과 순응이 섞여 있는 오늘날의 MZ 입장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말투도 겉모습도 과장되고 촌스럽긴 하지만 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MZ세대가 이끄는 뉴트로, Y2K무드와 싱크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울사투리의 배경에 등장하는 헤드폰, 유선 이어폰, 키링, 통 큰 바지, 닥터 마틴, 어그 부츠, 버켄스탁 등 MZ세대에 의해 새롭게 해석된 패션 소품과 화장법이 그리 낯설지 않다.
©SNL코리아
90년대의 청춘과 오늘날 청춘들은 각자의 취향을 중시하고 남과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길 좋아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이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Z세대는 모든 걸 경험해본 X세대와 달리 90년대를 살아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사투리는 결국 도시 서울이 아닌 풍요와 동경, 자유와 낭만이 교차했던 서울의 90년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주문과도 같다. 웃기거나 촌스러워 보이면서도 한편에선 그 당시 당당하고 힙하고 개성이 강한 패션과 말투 속에 담긴 쿨함과 낙관이 가득한 90년대의 분위기를 현재로 가져와 즐기는 하나의 유희다.
그렇다면 90년대의 분위기란 무엇일까. 특히 1990년대 미국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Y2K무드, 뉴트로 붐의 원천이다. 정치적으로 냉전이 종식되고, 경제적으로는 빌 클린턴 시대라고 명명하는 풍요를 거듭한 시절이며, 사회문화적으로는 <프렌즈>로 대표되는 X세대의 개인주의와 자유로움과 다양성을 반영한 라이프스타일이 꽃을 피운 시대였다. 진보적이고 다양한 색채의 독립영화부터, 자본과 긍정을 품은 블록버스터, 90년대 청춘의 상징인 시트콤 <프렌즈>, 힙합과 얼터너티브 락의 황금기는 물론 야구와 농구, 프로레슬링 등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글로벌 비즈니스로 팽창했다.
이런 영향을 고스란히 접한 우리나라에서도 기성세대가 쥐고 있던 문화 주도권을 쟁취한 첫 번째 세대로 X세대가 등장했다. NBA, 랄프로렌, 할리우드 영화, 폭발적으로 성장한 가요 시장 등 그전과 비교할 바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압구정 로데오거리와 홍대 앞을 거점으로 스스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일궈냈다.
따라서 서울사투리가 코미디로 큰 사랑을 받는 것은 지금 현재와 다른, 풍요와 낭만이 가득했던 90년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호기심의 연장선상이라 보는 편이 설득력 있다. 크게 다르지 않은 누군가의 존재를 발견하며 위안과 희망을 찾는다. 과거를 극복과 선긋기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호기심을 갖는 문화는 Z세대들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이는 레트로, Y2K무드가 오래도록 번영하는 이유다. 디지털네이티브라 할 수 있는 이들은 유튜브 등 접근성 높은 광대한 아카이브에서 과거를 꺼내보는 발굴에 능하며 이런 행위를 통해 현실의 답답함과 결핍을 파훼하는 신선한 자극과 용기를 얻는 법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시트콤 <프렌즈>의 전설적인 타이틀곡 ‘I’ll be there for you’처럼 1990년대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Y2K무드, 뉴트로 붐의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결과 트렌드의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여러 세대가 함께 줄넘기를 같이 하듯 같은 사이클 안에서 즐긴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다. 앞서 언급한 패션은 물론이고, 90년대 청춘의 우울과 감성을 담아냈던 왕가위, 이와이 순지, 미야자키 하야오, 대만 뉴에이지 영화들, 오래된 빈티지 밴드 티셔츠 등에 30여 년이 흐른 오늘날 Z세대 힙스터들이 감응하고 있다.
“오늘날 메가트렌드는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MZ세대가 발견하고 새로운 것에 여전히 열광하는 X세대가 동참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공식이 서울사투리에서도 반복되는 중이다. 2022년 ‘아마존 올해의 책’에 꼽힌 <90년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90년대는 ‘낭만’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의할 수 있는 지구 역사상 마지막 낭만의 시대였다. 서울사투리는 그 낭만의 시대로 건너가는 무척 유쾌한 여행 수단이다.
90년대 청춘의 상징, 시트콤 <프렌즈> ©warnerbr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