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우성
이우성은 러너이다. 패션매거진 에디터로 오래 일했으며 2015년 콘텐츠제작사 미남컴퍼니를 만들었다. 뉴욕을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러닝 매거진 <러너스월드> 한국판의 초대 편집장을 지냈으며, 최근엔 러닝 이벤트 ‘slow slow quick quick’을 만들었다. 다양한 매체에 러닝 칼럼을 쓰고 있다.
지금의 50~70세대 러너들은 ‘러닝’보다 ‘마라톤’이란 단어가 익숙하다. 주말마다 공원에 모여 동호회 이름을 걸고,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 완주를 중요하게 여겼고,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함께 버티는 약속’이었다. 이러한 달리기의 집단적 가치는 브랜드와 젊은 층의 취향이 어우러지며 개인적 미학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31일, 나이키는 전 세계 25개 도시에서 동시에 ‘Nike+ Human Race’라는 달리기 이벤트를 개최했다. 10km 대회였다. 서울을 포함 약 80만 명이 참가했다. 뮤지션들의 공연도 열렸고, 브랜딩 전반적으로 젊고 에너지가 넘쳤다. 기존의 ‘마라톤’ 대회와는 느낌이 달랐다(심지어 나이키는 잘생기고 아름다운 모델들을 행사에 대거 투입시켰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달리기가 아니… 러닝이 힙할 수가 있구나’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러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젊어졌다. 당시 이 대회를 준비하는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필자가 “대회는 반드시 저녁에 열어야 해요. 금요일에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토요일 새벽에 대회를 어떻게 나가요?”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정말 그런 이유였는지, 아니면 다른 나라 도시들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대회는 오후 6시에 열렸다. ‘불금’이 러닝보다 유행이던 시절이니까. 러닝보다,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는 게 더 큰 도전이던 시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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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후, 러닝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여러 유럽 국가에서 나타난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나이키, 아디다스, 아식스, 뉴발란스, 호카, 브룩스 등의 브랜드가 경쟁적으로 신제품 러닝화를 출시했다. 그랜드 뷰 리서치(Grand View Research)의 ‘Running Shoes Market Report(2023)’에 따르면 글로벌 러닝화 시장은 2022년 약 2,900억 달러 규모에서 2030년 4,600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러닝은 이제 거대한 생활 산업이자 감각의 산업으로 확장됐다. 최근의 한국만 놓고 봐도 이런 모습은 두드러진다. 새벽 그리고 오후 5시 이후 공원에 가면 늘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2000년 중후반 뉴욕에 출장을 갈 때마다 ‘뉴요커들은 달리기를 꽤나 좋아하네’ 혼잣말하며 신기해했는데, 이제 한국 사람들 역시 그렇다. 그리고 전혀 신기하지 않다. 모든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인 생각에 그 중심에는 엘리우드 킵초게라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사실 2008년 즈음 나이키가 본격적으로 러닝 카테고리에 힘을 주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주도적인’ 브랜드로 인정 받지 못했다. 아식스, 브룩스, 서코니 같이 전통적인 러닝 브랜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전복시키기 위해 나이키는 ‘미드솔에 카본을 넣은’ 러닝화를 출시했다. 어느 브랜드가 먼저 카본 러닝화를 만들었느냐는 논쟁적이지만, 나이키가 이 엄청난 반발력을 지닌 러닝화를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신발을 엘리우드 킵초게라는 곧 전설이 될 마라토너에게 착용하게 한다.
그 일환으로 2017년, ‘브레이킹2(Breaking2)’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두 시간 안에 완주하는 프로젝트다. 러너에게 최적의 조건을 인위적으로 설정해, 인류가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는 ‘2시간’의 벽을 박살낸다는 계획이었다. 킵초게는 27초 차이로 실패했지만, 사실상 이 프로젝트를 통해 나이키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리고, 단숨에, 정말 단숨에 러닝화 시장에서 주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또한 킵초게는 이 카본 러닝화를 신고 세계 주요 대회를 석권하며 신기록을 갈아치운다. 그리고 그는 2019년 기어코 42.195km를 1시간 59분 40초에 달린다. 비록 ‘최적의 조건을 인위적으로 설정’한 대회지만 그는 어떤 인간도 경험하지 못한 곳에 도달해버린다.
킵초게의 위대한 점은 전 세계적인 러닝 이벤트를 인류의 거룩한 도전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킵초게는 단순한 러너가 아니었다. 그는 ‘러닝의 철학자’였다. 첫 브레이킹2에 실패했을 때 필자는 현장에 있었고, 기자회견도 참석했다. 그가 말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인류에겐 겨우 27초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기술이 속도를 재정의한 시대, 킵초게의 언어는 러닝을 태도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러너들은 그의 언어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를 존중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농부이기도 하다. 훈련이 없는 날은 직접 밭에 나가 일을 한다. 그는 농사를 짓는 이유로 “지속가능한 삶과 자립, 자연과 함께하는 균형 있는 일상을 살기 위해”라고 밝힌 바 있다. CNN, BBC 등과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단순한 삶을 원한다. 마라톤이 끝나면 밭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곤 했다. 필자는 킵초게가 보여준 도전, 삶의 방식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러닝이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2008 Nike+ Human Race in Paris ⓒ 위키미디어
ⓒ 나이키
러닝 크루는 이 모든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브레이킹2가 시작되던 시기만 해도 한국은 서울을 중심으로 서너 개의 러닝 크루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2018~2019년을 지나며 러닝 크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크루를 만들었던 사람 중 대부분은 이제 30~40대가 되었다. 현재 크루는 20~30대와 40대 초중반 구성원이 어우러져 있다.
초기 러닝 크루는 한국의 러닝 신이 확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SNS에 친숙한 시대였다. 그래서 다양한 러닝 활동을 SNS에 업로드했다. 그 이미지들은 즐거워 보였고, 열정이 느껴졌으며, 긍정적인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들의 무드는 힙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50~70대 러너들이 동호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이들은 자신의 집단을 ‘크루’로 명명했다. 이전 세대가 달리기를 인내와 완주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이들은 도전과 자기 증명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전 세대가 기록을 자신과 동일시했다면 이들은 SNS 계정에 자신을 아카이빙했다. (물론 이런 분석은 전반적인 경향일 뿐이다. 러너에게 PB(최고 기록)는 중요하다.)
사실 세대 구분은 모호하기도 하고, 권장할 만한 분석 방식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러닝 시장을 주도하는 것이 3040도 5070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2030세대다. 이들은 러닝을 감각과 연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SNS와 크루가 없다면 달리기도 없다. 달리기 자체보다 달리는 자신, 자신과 함께 달리는 집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리며 자신을 표현하고, 취향을 증명하고자 한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선글라스를 착용하는지가 중요하다. 어떤 음악을 듣고 어디를 달리는가가 중요하다. 마라톤 대회가 끝난 후에 함께 모여 파티를 하는 게 중요하다.
그들은 셀러브리티와 함께 달리거나 그들 스스로 셀러브리티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러닝 컬처’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러닝 기록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러닝을 기록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새로운 러너들은 스스로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되었다. 누군가는 그들을 ‘패션 러너’라고 비꼬지만, 그들은 이런 호칭을 ‘쿨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 인스타그램 #러닝크루 캡처
한동안 나이키는 ‘러닝 힙’의 상징이었다. 카본 러닝화 이후로 러닝화 시장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전통적인 브랜드도 여전히 건재하지만, 나이키가 시작한 이른바 ‘힙’한 러닝의 세계는 영원히 빛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재의 2030세대가 러닝 시장의 코어로 급부상한 이후 기세가 꺾였다. 모두가 나이키를 신고 나이키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힙한 브랜드가 가장 흔한 브랜드가 되어버린 역설. 남다른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들은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갑자기 모두가 ‘온(on)’의 러닝화를 신고 이 브랜드의 의류를 입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온’ 러닝화를 패션 슈즈로 신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갑자기 이 신발이 본연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의외로 이유는 간단하다. 온 제품이 멋있고, 이 브랜드를 착용하는 러너는 적었다.
새티스파이 같은 브랜드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 발음하기 어려운 브랜드는 태생이 프랑스 파리다. 도시 감성의 패셔너블한 러닝 의류를 만든다. 가격도 비싸다. 러닝 크루에 가면 적게는 열명 많게는 30명 이상이 모인다. 그들 사이에서 더 빠르게 달리는 것 못지 않게 더 멋있게 보이는 것은 중요하다. “이 옷 어디 거야?” “새티스파이”라고 말할 때의 우월감은 그들이 달리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은 이러한 자기 증명이 달리기라는 활동의 일부라고 믿는다.
ⓒ 새티스파이
한국체육진흥회가 발표한 2024 러닝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국내 러닝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었다. 전체 인구의 약 5명 중 1명이 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 존2 러닝을 하는 러너들이 늘고 있는데, 이 변화는 새삼 들여다 볼만 하다. 존2 러닝(Zone 2 Running)은 심박수 60~70%의 느긋한 페이스로 달리는 것이다. 숨이 차지 않고, 대화가 가능하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따르면 ‘존2 러닝’ 검색량은 2023년 대비 2024년에 180% 이상 증가했다.
존2 러닝은 빠름보다 지속, 경쟁보다 회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몸의 근육만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천천히 달리면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달리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누군가는 최고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 러닝을 한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누군가는 집단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러닝을 한다. 반면, 천천히 달리면서 세상과 연결되기를 바라는 러너들도 있다.
전설적인 육상 선수 에밀 자토펙은 말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새의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나는 것이고, 물고기의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헤엄치는 것이다. 인간은? 필자는 지금의 러닝 신이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모두 다르게, 혹은 비슷하게. 다양한 문화의 어느 일부로서. 러닝은 인간이 세상과 연결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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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자토펙 ©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