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파세대가 디지털로 부활시킨 문구류

글. 김경은

이데일리 기자

새해를 맞아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직장인 A씨(26)는 교재를 읽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때면 문방구를 찾아 스티커와 펜 등 문구류를 잔뜩 구매해 필기 노트를 꾸민다. 자정이 넘어서도 A씨의 문방구 쇼핑은 계속된다. ‘디지털 문방구’가 24시간 열려 있기 때문이다.

노트 대신 필기앱을 쓰는 잘파세대

잘파세대(Z+알파세대)가 문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잘파세대는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Z세대와 2010년 초반 이후에 태어난 알파세대의 합성어로, 이들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다.

이들의 학창 시절 역시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디지털 기기가 함께 했다. 특히 2015년 아이패드용 터치펜인 애플펜슬이 출시된 이후 학습 분야에서도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학가에서는 책 대신 태블릿PC 사용이 일반화됐다. 강의 자료를 프린트하는 대신 태블릿PC에 내려받으면 자료 위에 바로 필기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는 초·중·고교 교실 현장도 디지털화가 빠르게 일어났다. 코로나19 기간 사용했던 원격 수업용 태블릿PC를 대면 수업에도 활용하면서 교실 책상에는 종이 교과서가 사라지고 있다. 교원 ‘빨간펜’, 대교 ‘눈높이’ 등 유·아동 대상 학습지 업체들도 방문 수업에 태블릿PC를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자꾸다꾸

이처럼 디지털 기기가 학습 영역을 차지하면서 학령인구(만 6~21세)를 주 고객으로 하는 전통 문구업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단순 교재뿐 아니라 학습에 사용하는 종이 공책, 잉크펜 등의 사용 빈도가 줄어든 결과다.

디지털 문구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종이 공책을 대신할 필기 애플리케이션(앱)과 ‘디지털 문방구’로 불리는 디지털 문구 콘텐츠 플랫폼이 탄생한 것이다. 디지털 문방구에서는 속지 개념의 템플릿은 물론 다양한 색상과 굵기의 펜, 스티커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최근엔 학습뿐 아니라 ‘다꾸’ 영역에서도 디지털 문구가 비중을 넓히고 있다. 다꾸는 자신만의 개성 있는 다이어리를 만드는 잘파세대의 문화를 일컫는다. 학습용 필기도구는 물론 다이어리와 캘린더의 자리도 디지털 문구가 꿰찬 것이다.

©플렉슬

©자꾸다꾸

매출 수천억
디지털 문구 뛰어드는 기업들

디지털 문구 시장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디지털 전용 문구 시장 규모는 120억 달러(약 16조 원)로 추산된다. 오는 2030년엔 157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관련 기업들의 성장세를 봐도 시장의 확장 속도는 가파르다. 세계 1위 디지털 필기 노트 서비스인 ‘굿노트’의 경우 2011년 창업 이후 외부 투자 없이 꾸준히 흑자를 내고 있다. 굿노트는 태블릿PC에서 손글씨와 키보드 입력을 함께할 수 있는 필기 앱으로, 원하는 용지 서식을 선택해 디지털 노트를 만든다. 굿노트 이용자들이 제작한 디지털 노트만 연간 19억 원에 달한다. 굿노트는 전 세계 175개국에서 이용 중이며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는 2,400만 명에 이른다. 이용자 수와 유료 서비스 가격을 단순 계산해도 매출은 수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굿노트6 버전 연간 구독료는 1만 4,000원으로 이용자 수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연 매출이 3,360억 원은 되는 셈이다.

국내에선 디지털 문구 콘텐츠 플랫폼 ‘위버딩’을 운영하는 누트컴퍼니가 이 분야의 선두주자다. 위버딩에선 전 세계 28개국 2,700여 명의 입점 작가가 1만 7,000개 이상의 콘텐츠를 팔고 있으며 누적 판매 콘텐츠는 20만 건에 달한다. 2020년 5월 서비스 출시 이후 회원 수는 매 분기 평균 60% 이상 늘고 있다.

위버딩의 노트 템플릿 이미지 ©누트컴퍼니

디지털 노트로 가계부를 작성하는 모습 ©누트컴퍼니

2020년 설립한 스타트업 낼나는 ‘낼나샵’을 통해 디지털 문구를 판매하며 지난 3년간 연매출 30억 원을 기록했다. 대표 제품인 디지털 플래너 ‘낼나다(내일을 나답게 다이어리)’를 비롯해 100여 개의 디지털 문구를 판매하고 있다.

아직 시장 초기인 만큼 스타트업들의 진출이 활발하다. 2022년 창업한 스타트업 아일로는 디지털 굿즈를 보관·이용하는 플랫폼 ‘하플’을 운영하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블루필은 필기 앱과 판매 기능을 동시에 갖춘 ‘체리픽’을 운영 중이다. 체리픽 사용자는 별도의 입점 절차 없이 자신이 앱에서 그린 그림을 스티커 등으로 만들어 판매할 수 있다.

출처: 리서치앤드마켓

2022년 기준 디지털 전용 문구 시장 규모는
120억 달러(약 16조 원)로 추산되고, 오는 2030년엔
157억 달러(약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위버딩 이미지 ©누트컴퍼니

문구뿐 아니라 식품기업까지 협업 ‘러브콜’

전통 문구업체들도 디지털 문구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글로벌 문구 브랜드 몰스킨은 2017년 디지털 기능을 접목한 ‘스마트 플래너’ 다이어리를 선보였다. 전용 펜으로 기록한 내용을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에 전송해 활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지난해에도 리뉴얼 버전을 출시했다.

국내에선 모닝글로리가 2022년 업계 최초로 디지털 문구를 선보였다. 굿노트 등 필기 앱에서 사용할 수 있는 노트, 플래너, 스티커 등 9종으로 제품을 구성했다. 모닝글로리는 10~20대를 중심으로 디지털 노트 꾸미기 시장이 확대되는 점을 감안해 관련 개발을 지속한다는 방침이다.

모닝글로리가 출시한 디지털 문구 ©모닝글로리

'다꾸' 플랫폼, 하플 ©하플

최근 들어서는 문구 업계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 디지털 문구 시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잘파세대가 소비 주도층으로 급부상하면서 이들 세대의 이용률이 높은 디지털 문구 플랫폼에 접촉하려는 기업들의 시도가 줄을 잇고 있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각각 아이패드와 갤럭시탭에 굿노트를 기본 앱으로 적용했다. 기업에서는 굿노트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노트 속지를 자체 제작해 소비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한다. 근래에만 네이버, bhc치킨, 에듀윌 등의 기업에서 노트 속지를 배포했으며 EBS도 전자책을 굿노트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앱 서비스를 연동했다.

bhc치킨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선보인 굿노트 플래너와 스티커의 누적 다운로드 수가 1만 4,000여 건을 기록했다”며 “문구 브랜드가 아닌 외식업체에서 디지털 플래너를 출시한 건 Z세대의 수요를 마케팅에 적극 반영하기 위함”이라고 전했다.

디지털 문구 시장 태동기
급속 성장 전망

업계에서는 태블릿PC 이용자들이 늘어나는 만큼 디지털 문구 시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10~19세 청소년의 51.9%, 20~29세 중에선 41%가 태블릿PC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미 잘파세대의 절반가량은 태블릿PC를 보유한 셈이다.

특히 오는 2025년에는 학습에 태블릿PC 이용이 필수화되면서 필기는 물론 취미 활동에 디지털 문구를 이용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교육부는 2025년부터 초·중·고등학교에 인공지능(AI) 기반 디지털 교과서를 도입한다는 목표로 학생 1인당 1기기 정책을 추진 중이다.

신동환 누트컴퍼니 대표는 “작년 기준 국내 태블릿PC 보유 가정 비율은 36%로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며 “디지털교과서 도입이 예정된 만큼 디지털 문구 콘텐츠 시장은 향후 급속도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네이버에서 선보인 굿노트 플래너 ©네이버

bhc치킨이 선보인 굿노트 플래너 ©bhc치킨

©웨이브

CONTENTS : GENERATION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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